* 해당 글에 등장하는 사건이 언급됩니다..?
"―불쌍하게도."
높은 곳에서 반짝이는 불빛과, 잘 꾸며진 무대. 그리고 배우의 또렷한 발성. 레하트와 나란히 객석에 앉은 타낫세는 저도 모르게 들뜨는 마음을 느꼈다. 연극이라면 방랑 극단 따위가 왕성에 방문했을 때 한 번 정도 본 적은 있다. 하지만 이렇게 제대로 된 실내 극장은 타낫세 또한 처음이다. 거기다 오랜만에 레하트와 단둘이 외출이었다. 관객이 드문드문 자리한 객석도 한산한 것이 오히려 오붓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듯해 마음에 들었다. 괜히 어린아이처럼 들뜨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너는 평생 여기서 나갈 수 없다."
무대 위에 선 배역이 정해진 대사를 읊는다. 숙련된 배우의 연기는 몹시 훌륭하여, 목소리 끝에 묻어나는 냉소의 기미를 객석에 앉은 자신도 또렷하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대사를 듣자마자 타낫세는 다소의 기시감을 느꼈다. 아니, 기시감을 넘어서 눈앞에 어른대는 수준의 익숙함이다. 잠깐, 이건 설마…… 반사적으로 제 곁에 앉은 레하트를 쳐다보았으나, 레하트는 반짝거리는 눈망울을 무대에 고정한 채였다. 이래서야 제 시선을 눈치채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대사는 착착 진행되어갔다.
"다른 누구도 너의 도착을 기뻐하지 않겠지만, 나만은 너를 환영해주마."
거기까지 듣고서 확신한 타낫세는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도망칠 뻔했다.
―그러니까, 낯선 극장의 낯선 희곡에서 과거에 제가 했던 말을 듣게 될 줄은, 그것도 자신이 레하트와 처음 마주했던 날 내뱉었던 것 같은 말을, '아마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옮긴 대사로 듣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처음부터 설명하자면, 며칠 전 아침의 일이었다. 그날도 김 빠질 만큼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아침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간단히 씻고. 치장하고. 식사를 결정하고. 시종으로부터 일정을 듣고. 이제는 일상이 된 모습에서 무언가 다른 게 있었다면, 레하트가 갑작스럽게 질문을 해왔다는 것 정도.
"타낫세, 이번 10일에 시간 괜찮아?"
커프스의 단추를 채우고 있던 타낫세는 레하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레하트는 일찍이 치장을 마쳤고, 자신도 시중을 물려 방 안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그녀는 어쩐지 생글생글한 얼굴이었다.
"10일…이라면 별다른 일정은 없다만. 무슨 일이라도 있나?"
공식적인 일정이라면 시종이 미리 알려주거나 했을 텐데, 짐작가는 것이 없어 타낫세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왜냐하면 자신은 영주의 반려였고, 이 저택에서 일어나는 일 대부분은 영주인 레하트의 귀에 흘러 들어갈 것이므로. 그 안에는 제 공적인 일정 같은 사소한 사항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일단 제 위치에 대해서 말하자면―왕성에서의 마지막 해, '그 일'이 있고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레하트와 혼인을 하고, 그들의 영지로 내려온 지도 어언 사 년째. 레하트는 한 영지와 저택의 주인으로서 완벽하게 일을 해내고 있었고, 두 해 전에는 아이까지 태어나 항상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하사받은 토지와 그에 따르는 권리를 전부 레하트에게 이양한 타낫세는, 그녀에 비하면 한가한 처지이긴 했지만 영주의 반려라고 해서 마냥 놀고 먹는 것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제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레하트는 들고 있던 두툼한 편지 몇 장을 건넸다. 타낫세는 의아한 얼굴로 받아들었다. 레하트의 이름으로 도착한 초청장이었다. 거창한 미사여구로 수식된 감사의 말을 대강 무시하고 읽어보니 레하트가 후원 중인 극단에서 보낸 것이다. 새로운 희곡의 초연을 올리는 날이기에, 후원자님께서 부디 와서 자리를 빛내주십사 하고.
이전부터 레하트가 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 사업에 두루두루 후원 중이라는 타낫세도 알고 있었다. 페넷 가의 공식적인 사업 외에도, 개인적으로 투자 중이란 것까지 직접 들어 알고 있었기에 그 자체로 크게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둘이 나가서 보고 오자. 어때…?"
레하트는 제 반응을 살피며 덧붙였다. 주로 시문학에 관심을 두던 타낫세였지만, 희곡도 크게 보자면 제 범주에서 벗어나는 종류는 아니었다. 극의 작가가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레하트의 안목이니 어련히 믿을 만할까. 이럴 때는 제 반려와 서로 흥미가 잘 맞는 게 다행인가 싶다. 거기다 오랜만에 레하트와 단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다. 그런고로 타낫세는 흔쾌히 승낙했다. 레하트는 새처럼 재잘대며 몇 마디를 더했다.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타낫세도 마음에 들어 할 거야. 내가 듣기론 사랑에 관련된 극이라고 하던 걸? 이 작가는, 이번에 이 극단이랑 계약을 하면서 우리 지원을 받게 된 작가인데 전작을 읽어보니 너무 좋더라 그래서 내가 어쩌고……" 그리고 "……당연히 타낫세 자리도 있어. 애초에 페넷의 이름으로 후원했던 거니까." 이 정도.
레하트와 오붓한 나들이라는 생각에 들떠 중간 부분은 약간 대충 들었던 것도 같다. 그리고 지금이었다.
타낫세는 무릎 위에 두었던 소책자를 펼치고 고개를 파묻었다. 낯이 홧홧하니 붉어져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아니, 그야 물론 극장 내는 어두웠고 애초에 관람객도 많은 편이 아니라 제 몰골을 볼 사람은 없었지만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다!
물론 타낫세가 그러든 말든 극은 진행되고 있었다. 소책자로 시야를 가리고 조금 더 지켜보니, 단순히 제가 했던 말을 대사로 쓴 것만이 아니라 아무래도 레하트와 자신의 이야기를 각색하여 만든 것이 맞았다. 총애자라든가 왕자라든가 하는 신분은 적당히 다른 것으로 바꾸어 썼고, 그 외의 자질구레한 배경 설정도 달라 모르는 이가 본다면 그저 극적인…사랑 이야기일 것 같았지만. 물론, 전말을 아는 제 입장에서는 오히려 자신만큼 깊이 개입된 사람이 소재를 제공한 탓에 세부 사항이 교묘히 각색되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왕성에서야 그들의 일을 둘러싸고 여러 소문이 돌았다지만, 그마저도 리리아노가 엄중히 단속한 탓에 바일이나 유리리에 정도나 슬쩍 눈치챘을까 말까 할 것이다. 거기다 그들이 입을 열었을 리도 만무하고, 타낫세 자신 또한 그런 적이 없으니 용의자는 레하트 뿐이다. 레하트는 무대 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연신 눈동자를 반짝거리고 있다.
"―저 배우, 연기를 잘하는 것 같아. 생긴 것도 마음에 들어. 물론 나한테는 타낫세 뿐이지만."
"레하트……."
레하트가 태연하게 귀엣말로 속살거리자 타낫세는 괜히 더욱 부끄러워졌다. 이전부터 레하트가 예술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알고 있었고, 그녀의 안목도 의심치 않았지만, 설마하니 자신들의 이야기를 극으로 써서 올릴 줄은 몰랐던 탓이다.
물론 그 자체가 불만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어설프게나마 창작에 뜻을 두고 있는 탓에 '언젠가 이야기로 써볼까' 생각을 한 적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거기다 야니에 백작의 도움을 받아 레하트와 혼인을 올린 이후 둘이서 주고받았던 연시와 서신을 책으로 엮어 출판한 것도 재작년쯤의 일이다. 부끄러워하는 것도 참 새삼스러운 일인 것이다.
그래도 제가 편집에 일조한 줄글을 읽어보는 것과 자신을 연기하는 배우를 면전에서 보는 건 조금 다른 일이다! 타낫세는 레하트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웅얼댔다.
"미리 말해주면 좋았잖아… 이, 이래서는 끝까지 볼 자신이…."
"응? 그러면 재미없잖아."
레하트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며 타낫세에게 기대었다. 동그마한 정수리가 시야에 쏙 들어왔다. 레하트가 조곤조곤하게 속삭였다.
"각본, 완성 직전에 읽어봤는데 나쁘지 않았어. 오히려 나는 남의 시선으로는 이런 느낌인가 싶어서 재밌던 걸. 우리 이야기인지도 다들 모를 거고…."
"아, 아. 너를 탓하려는 게 아냐. 그냥…" 타낫세는 조심스럽게 단어를 골랐다. "조, 조금 예상치 못해서 그런 것뿐이니까."
"미리 상의하지 못한 건 미안해. 놀래켜주고 싶어서…. 그래도 타낫세와 있었던 일들은 무척 소중하니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남기고 싶었어."
레하트는 시무룩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타낫세는 순식간에 무거운 부채감에 휩싸였다. 애초에 자신이 레하트가 하는 일에 가타부타 말을 붙일 처지나 되었나? 그때의 일들을 레하트가 괜찮다 생각한다면 자신도 괜찮을 일이다.
"아니, 나도 좋아. 레하트, 저기 좀 봐라. 지금 나온 저 배우가 아주 훌륭한―"
타낫세는 혹시라도 레하트가 실망할까 횡설수설 아무렇게나 말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조금 전 등장하여 남자 주인공 뒤에 선 배역은 인상이 험상궂고 덩치는 산 같은 게 딱 봐도 각색된 모르다. 아마 지금도 진짜 모르가 이 극장 어딘가에 있을 텐데. 타낫세는 입을 딱 다물었다.
"응, 응. 그렇지? 배역 선정도 아주 잘 됐어. 거기다 작가가 비중을 생각보다 늘려서, 이쪽 이야기 줄기도 재밌을 거야."
레하트는 제 반응을 놀라움이라 해석했는지 순식간에 밝아진 어조로 이것저것 설명했다. 모르의 비중이 높다니, 애초에 그 과묵한 위사가 그들의 이야기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인가…? 거기다 어떤 재밌는 이야기? 모르와 재미가 공존할 수 있는 단어였나…? 그것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입에 올리기 전에, 타낫세는 다정하게 달라붙는 레하트의 손길에 의해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진행되는 연극 속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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