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10
로니레하

* 카모카테 로니카/레하트
* 로니카 애정B(톳 대결x) - 왕 엔딩 이후







      단상 아래 선 젊은 왕의 주위에는 연기나 구름, 혹은 각다귀 떼처럼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매달 흑의 주, 10일마다 열리는 무도회에는 수많은 사람이 참석한다. 귀족, 신관, 저명한 인사와 관료들. 로니카 벨 하라드는 벽의 그늘에 대기한 채 오늘의 방문객들을 둘러보았다. 인선에 특별한 것은 없다. 그보다 로니카가 염두에 둔 것은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다. 이런 곳에서는 똑같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모셔지는 자에 비해 모시는 자는―기둥 뒤의 그림자처럼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림자를 알아보는 것은 같은 그림자뿐이다.
      의미 없이 이어지는 대화들 속에서 오가는 한 마디의 말로 수많은 계약이 이뤄지고, 또 파기된다. 그리고 자신 외에도 수많은 자들이 그늘 속에 숨어 사람들이 흘리는 말을 줍고 있을 테다.
      오늘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주제는 대부분 젊은 왕에 대한 것이다. 리리아노가 란테 저택으로 떠난 것이 두 해 전의 일. 새로운 왕이 된 레하트는, 그녀가 가진 배경에도 불구하고 5대 왕의 전통을 착실히 고수하며 철저하게 귀족 중심적인 정치를 펼치고 있었다. "나는 네세레와 다르다"를 적극적으로 증명하려는 듯한 그녀의 행보는 충분히 굴욕적인 동시에 효과적이었다. 귀족들은 그녀의 행동을 두 팔 벌려 환영했고, 그녀를 자신의 무리로 끌어들이고자 애쓰고 있었다.


      춤곡이 서너 번 정도 흘렀을 때 문득 레하트와 시선이 마주쳤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의도적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다 곧 고개를 돌려버렸다. 사람들이 레하트의 시선을 쫓고 있었더라도 눈치채지 못했을 만큼 아주 짧은 찰나였다. 시종은 왕이 자신을 부르는 신호임을 알고, 그늘 속에서 걸음을 뗐다.

      로니카는 평범한 시종처럼 인파 사이로 섞여 들었다. 빠른 걸음으로 사람들을 제치고 그 곁으로 갔다. 지근거리에서 그녀를 모시던 위사들이 시종을 알아보고 길을 비켜주었다.
      레하트는 방금 전까지 누군가와 환담을 나누고 있었는지 한 무리의 귀족들이 모여있는 방향을 쳐다보고 있었다. 레하트의 오른편에 선 로니카는 그 방향을 가늠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후작과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셨습니까?"
      "음. 평범한 옛날 이야기였어. 총애자 시절의 이야기를 좀 했거든."

      레하트는 느긋하게 몸을 돌려 자신을 마주했다. 아름다운 얼굴 위로 회장 내 수많은 구혼자들이 바라고 있을 매혹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첫 무도회에서 촌뜨기 같은 모습에 비하면 요즈음은 아주 훌륭하다고, 후한 평가를 해주시더군. 부디 지금처럼만 해달라던데."

      젊은 왕은 그렇게 말하고 가벼이 웃었다. 다른 시종이 다가와 쟁반에 받친 음료를 건넸다. 레하트는 잔을 건네받고는 그 안에 담긴 과실주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가 잔을 빙글빙글 돌리자, 연한 빛깔의 액체가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참으로 무도한 자군요." 제 주인은 썩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았지만, 로니카는 언짢음을 참으며 등 뒤로 손을 모으고 섰다. 과실주를 한 모금 들이킨 레하트가 말했다.
      "뭐, 귀족들이란 다 그렇지. 오히려 그의 입장에선 진심이 담긴 칭찬이었을 거야. 그에겐 미혼인 아들이 있잖나. 내게 밉보여서 좋을 일이 없지."
      "그 아들은 제대로 구애할 용기조차 없어 아비에게 대신 부탁하는 모양입니다만…."

      로니카는 레하트가 말한 남자를 연회장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이제 스물 하고도 서넛 정도 먹었을까 싶은 그 청년은, 그의 아버지 되는 후작과 다른 중소 귀족들 사이에서 이쪽을 흘깃대며 쳐다보고 있다. 레하트는 시종의 시선이 향한 곳을 잠시 바라보더니 더욱 활짝 웃어 보였다.

      "안 그래도 내게 와서 춤을 청하긴 했다네. 비록 쉬고 싶다는 핑계로 거절하긴 했지만."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젊은 왕에겐 왕배가 없었고, 귀족들이 리리아노의 선례와 같은 일을 만들지 않겠노라 이를 갈고 있단 것 정도는 자신도 아는 사실이었다. 더하여 전 계승자였던 바일이 성인이 된 이후 혼인 제의를 모조리 거절 중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레하트는 혼인 그 자체보단 그로 맺어질 동맹을 필요로 했기에―공공연히, 그리고 적극적으로 왕배를 구하고 있었다.
      철저히 정치적인 결합이었으므로 레하트는 구혼자들에게 가차 없이 값을 매겼다. 사실 후보는 어느 정도 추려진 뒤였고, 그녀의 최측근인 자신 역시 물망에 오른 사람이 누구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 목록에 후작의 아들은 없다는 것까지도. 하지만 여기서 꺼낼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 남자 이야기는 됐고." 레하트 역시 무심하게 일축했다. "오늘따라 무도회도 지루하군. 죄다 비슷한 사람들뿐이고. 아, 미혼의 왕이 대놓고 짝을 찾고 있으니 꼬리깃을 자랑할 사람들만 오는 건 당연한가."

      왕 스스로가 내리는 신랄한 평가에 로니카는 별로 대답할 말이 없었다. 레하트 역시 그의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홀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예전에는 당신이 날 구해주던 재미라도 있었지. 인파가 몰렸다 싶으면 스르륵 나타난 당신에게 손목을 붙잡혀 끌려나가는 게 그렇게 즐거웠거든."

      레하트가 눈동자만을 도르르 굴려 회장 안을 훑었다. 귀중한 수정이 아낌없이 사용된 조명이 수없이 매달려, 화려하게 자리를 물들이고 있었다. 그 안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5대 시절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공간이다. 문득 몇 해 전, 리리아노가 관을 쓰고 있던 시절이 떠올랐다.

      …레하트가 아직 분화를 거치지 않은 아이였을 시절. 그때도 그녀는 준비된 것만 같은 귀족적인 인재였다. 조금의 교육만으로 빛을 본, 타고난듯한 말솜씨와 당당한 태도, 우아한 행동거지는 그녀가 왕위를 '획득'하는 것에 있어 큰 지분을 차지했다. 위사의 무대가 어전대회라면 그녀의 대회장은 연회장의 플로어 위였다. 늘어지는 조명과 희미한 열기. 파리떼처럼 모여든 사람들. 그들 사이를 부유하는 소문. 밀담. 정교한 박자의 움직임과 몸짓. 그녀는 어항에 사는 화려한 관상어와도 같이 그들의 사이를 헤엄치며 시선과 관심을, 왕위를 샀다.

      그렇게 연회장을 죽 훑던 왕의 시선은 이윽고 그에게 툭 떨어졌다. 완전히 여성이 된 그녀는 분화를 거치며 모습이 크게 달라진 편이었지만, 그 시절의 잔재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휘어진 눈꼬리에, 호선을 그리는 입매에. 그리고 목소리에.
      그 목소리가 다정히 자신을 불렀다. 로니카.

      "오늘은 날 구해주지 않을 텐가?"

      레하트가 은근히 속삭였다. 로니카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곧 결심했다. 그녀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목덜미에서 체온에 덥혀진 익숙한 향과, 과실주의 향기가 훅 느껴진다. 귀엣말로 속삭였다.

      "…제가 지금 아주 중요한 소식을 전했다고 생각하시고,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주위를 둘러보세요. 눈치 보는 자들이 적당히 생기면 폐하가 먼저 출발하십시오. 뒤따르겠습니다."

      레하트가 눈썹 한쪽을 치켜올렸다. 곧 그녀는 제 말대로 자못 심각한 척 입매를 굳히더니 고개를 숙이고 속살댔다.

      "이런 것도 적당히 하라던 때는 언제고?"

      명백히 즐거워하는 목소리다. 새침하게 침묵을 지키니 레하트는 작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뭐, 좋아. 저들을 골려주는 일도 재밌으니까.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면 되겠지."

      우아한 맵시로 말을 맺은 레하트는 위사들에게 뒤를 따르라는 손짓을 보내고는 휙 몸을 돌려 회장을 가로질렀다. 왕의 갑작스러운 이탈에 회장의 분위기가 다소 어수선해졌다. 귀족 몇은 저들끼리 숙덕대기 시작했다. "잠시 자리를 비우지. 부디 그대로 즐기시게." 레하트는 그렇게 말하며 유유히 사람들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 바람이 일며 밝은 색의 의복이 가볍게 펄럭였다.



      "그렇지만 도망갈 곳이 없구나. 결국은 여긴가."

      레하트는 연회장을 빠져나와 묘하게 비어있는 느낌의 왕성을 천천히 헤맸다. 방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고, 방문객과 마주칠 위험이 있는 복도는 피해서 다니다 보니 갈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었다. 겨우 내빈실이 비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리로 이동했다. 호위는 문 밖에 세워둔 채 노시종만을 대동했다. 왕은 내빈실의 문이 닫히자마자 바로 신발을 벗어던지고, 긴 소파로 걸어가 털썩 몸을 기댔다. 예복이 구겨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소파의 한 귀퉁이에 발을 밀어 넣었다. 풍성한 치맛자락 아래로 하얀 맨발이 잠깐 드러났다가 밑단 속으로 사라졌다.
      로니카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바닥에 널브러진 신을 가지런히 모아 소파 앞에 내려놓았다. 위에서 차분한 어조의 목소리가 내려왔다.

      "…로니카."
      "예."

      레하트는 먼저 말을 꺼내놓고도 조용했다. 로니카는 잠시 무릎을 꿇은 채로 말없는 주인의 의중을 헤아렸다.

      "차를 준비할까요."
      "괜찮아. 그냥 이대로 쉬고 싶어."

      레하트가 턱을 괴고 한쪽으로 몸을 기울이자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옅은 빛깔의 폭포를 이루었다. 고개를 들자 답지 않게 애수 어린 시선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취기로 살짝 풀어진 얼굴은 무에 그리 기분이 좋아졌는지 희미하게 웃음기가 감돌았다. 붉은 기운이 어린 홍채에 오롯이 자신만이 담겼다.

      …젊은 왕이 어떤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레하트는 자신으로서는 알 수 없는, 사랑이라는 이유를 자꾸 입밖에 냈다. 그녀를 가로막는 게 나이나 신분 같은 지극히 상식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어느 해의 마지막 날 이후―자신과 어떤 '약속 아닌 약속'을 한 이후, 늘 같은 얼굴을 한다는 것도.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것을 열망하는 눈빛. 동시에 한 걸음 더 나아가길 욕심내지 않는 자의 기묘한 열기가 서린 그 시선을 시종은 묵묵히 받아냈다.

      레하트가 턱을 괴지 않은 쪽의 손을 시종을 향해 내밀었다. 로니카는 움찔 떨었다. 느릿하게 움직인 손이 잿빛으로 샌 머리카락을 스치고, 닿지 않는 영역에서 윤곽선을 그리듯 천천히 움직였다. 손가락이 시종의 귓가에 닿기 직전 주인은 도로 손을 거두었다. 이내 천천히 손바닥이 보이도록 한 채 소파 아래로 늘어뜨렸다. 레하트는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명령했다.

      "피곤해. 좀 주물러 줘."

      평소 로니카가 아니라 다른 사용인에게 시키는 일이었지만, 누군가를 부르는 건 왕이 원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로니카는 묵묵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전반적으로 흉 없이 매끄러운 피부였으나 손바닥엔 군데군데 굳은살이 잡혀 있었다. 펜보다는 검을 다루는 이들 특유의 흔적이다. 왕이 꾸준히 무예를 단련 중이라는 건 그녀의 측근이라면 누구든 아는 사실이다. 얼마 전 검을 바꾼 탓에 더욱 늘어난 것도 같았다.

      "교관에게 훈련용 검을 조금 더 가벼운 것으로 바꾸라 전해두겠습니다."

      로니카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응, 성의 없이 대꾸한 레하트는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술기운에 체온이 올라간 것인지 살짝 뜨거운 손바닥을 로니카는 천천히 힘을 주어 눌렀다. 두꺼운 엄지 너머로 얕게 부풀어 오른 둔덕, 갈라져 나온 나뭇가지 같은 손금, 단단한 뼈대가 느껴졌다. 손목뼈에 이르자 불규칙하게 뛰는 맥박이 느껴졌다. 몇 번 반복한 뒤 조심스레 다시 소파 위에 내려놓았다.

      시종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멀지는 않으나 내려다볼 정도의 거리는 아닌 위치에서, 등 뒤로 손을 모으고 시립했다. 정확히 한 보 정도의 간격. 두 사람 외엔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로니카는 레하트에게서 들려오는 고른 호흡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레하트는 잠든 척하는 것인지, 혹은 정말로 잠에 겨운 것인지―그대로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직 연회가 파했을 시간은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자리를 비운 것에 대해 대충 눙치고 오늘의 행사를 그런대로 끝맺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로니카는 주인을 깨우지 않았다.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서 있었다.



      이윽고 그의 주인이 정말로 잠들고, 연회마저 파하여 사람들이 전부 돌아간 뒤 로니카는 밖에 서 있던 위사들을 조용히 불러 탑으로 돌아갈 것을 지시했다. 잠 기운에 축 늘어진 몸을 안아 드는 것은 자신이 했다. 레하트가 벗어둔 신발도 한 손에 챙겼다. 조용한 복도를 걷는 동안, 열린 창문에서 쏟아진 달빛이 잠든 눈꺼풀 위로 내렸다. 그러나 젊은 왕은 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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