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29
커미션//타나레하

*공백 포함 4,657자

*카모카테 타낫세/레하트 애정B 엔딩 기반

 


 

 

     "……그래서, 왜 온 거야?"

 

응접실에 들어선 자신을 보자마자 내뱉어진 것은, 느닷없고, 매섭지 않은 어조의 추궁이었다. 타낫세는 반사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어쩐지 이 사람 앞에서는 말 한 마디 허투루 내뱉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탓에 저도 모르게 굳어버렸지만, 오늘은 다른 이와 함께였기에 아무렇지 않은 척 준비했던 인사말부터 냈다.

 

     "오랜만입니다, 야니에 스승님. 그간 격조해서……."

 

야니에 백작의 저택에 방문하게 된 건 거진 삼 년만이었다.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슬그머니 그녀의 눈치를 살피었다. 디톤에서 가르침을 받다 멋대로 떠나버린 이후로도 편지로는 계속해서 교류를 해왔으나, 왕성을 나와 디톤 인근으로 내려왔음에도 얼굴을 비추지 못한 점이 마음에 걸렸다. 야니에가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인 점은 알았지만. 백작은 테이블 멀리에 있는 깃펜을 끌어오느라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타낫세를 향해 툭 질문했다.

 

     "신작에 들어갈 서문 때문이라면 저번에 편지로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그것도 있지만 직접 얼굴을 뵙고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직접 얼굴을 보는 것은 거의 몇 년 만인데도 꼭 엊그제 보았던 이를 대하듯 평이한 어조와 일견 무심해 보이는 눈빛은,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야니에는 타낫세가 들이닥치기 전까지 하고 있었던 일로―테이블 위 흩어진 원고지들과 수사학 책으로―돌아가 고개도 들지 않은 채로 말했다.

 

     "일단 들어와. 계속 서서 이야기할 셈이냐."

 

무난한 허락이었다. 쫓겨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애초에 오늘 방문에 대해서도 미리 통고한 참이었지만, 어쨌거나 기본적으로 알 수 없는 구석이 있는 사람이니까. 타낫세는 다소 안도하며 먼저 제 동행에게 의자를 빼주고 나서 그 옆에 앉았다. 그제야 백작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은 타낫세 자신이 아니라 제 동행을 향해 있었다.

 

     "그럼, 이쪽은?"

     "……제, 제 아내입니다. 레하트, 이 분이 내 스승님이신 야니에 백작님으로…… 내가 디레마트이로 책을 내게 된 것도 이분 덕이야."

 

타낫세는 그렇게 말하는 동시에, 무심결에 제 아내인 레하트를 붙잡은 손에 꾸욱 힘을 주었다. 아내라는 단어를 입에 담자 어쩐지 낯간지러운 감각이 뭉게뭉게 솟았다. 혼인을 한 지도 적잖은 시간이 흘렀건만 여전히 사소한 부분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이유는, 그는 오랜 시간 타낫세 란테 요아마키스―이제는 타낫세 요아마키스 페넷이지만―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런 부분에서 망설이면 안된다는 사실 정도는 아주 잘 알았고, 흘긋 레하트의 눈치를 살피자, 자신과 마찬가지로 파란 눈동자가 생긋 미소를 지어주었다.

레하트는 선물로 가지고 온 구움과자를 테이블 위에 올리고는 야니에를 향해 이야기했다.

 

     "이전부터 신세 지고 있다고,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이건 약소한 선물이에요. 가볍게 가슴께에 왼손을 올린 채 인사하는 몸짓이 참 우아했다. 짧은 순간에 잘도 그런 생각을 한 타낫세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옅은 미소를 올렸다.

 

……레하트는, 당연하게도 자신이 디레마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제 반려인 레하트에게 일부러 숨길 생각까지야 없었고, 한 집에서 생활하는 이상 언젠간 알게 될 지 모른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그야, 왕성에서부터 알고 있었는걸?" 하는 말에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도대체가 어떻게 제 주변에서만 이렇게 여기저기서 알아채고 튀어나오는 것인지. 어쨌거나 야니에 백작을 방문할 예정이라 알리자 레하트는 동행해도 되겠냐 제안했고,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던 탓에 함께 오게 된 것이었다.

 

     "아, 그런가."

 

레하트의 소개가 끝나자 야니에는 그렇게만 말하고 쉽사리 속내를 가늠할 수 없는 표정으로 레하트를 쳐다보았다. 일전에 분명 편지로 말해두었던 것 같은데, 소개를 듣고도 변함없는 야니에의 얼굴을 보니 사실은 자신이 혼인을 했다는 일 자체를 이야기하지 않은 건 아닌지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었다(…아니, 분명 이야기했었다. 몇 번이나!). 백작은 레하트를 빤히 바라보다 내뱉었다.

 

     "흐응, 네가 그랬구나."

 

야니에 백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턱선 부근에서 마구 뻗친 붉은 머리카락이, 돌아서는 몸짓에 휙 흔들렸다. 몇 걸음 걸어가 뒤에 놓인 탁자 위에 놓인 원고 다발을 집어 든 그녀는 종이 몇 장을 팔락팔락 넘겼다.

 

     "네?"

     "………예?"

 

레하트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타낫세는 떨떠름한 태도로 되묻자 야니에는 이쪽을 돌아보고 명백히 재밌어 보인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아니라 레하트를 향해서. 원하던 것을 찾은 것인지 자리로 되돌아온 그녀는 목을 가다듬은 뒤, 종이를 들여다보며 느긋한 낭독을 시작했다.

 

     "거친 바람이 푸른 달 고운 꽃봉오리를 흔들고

     여름의 빌려온 기간은 너무도 짧아

     그러나 그대의 영원한 여름은 퇴색하지 않고 [각주:1] ……."

 

그녀가 읊은 부분은 타낫세도 몇 번이나 퇴고를 거치며 익히 보아온 구절로 유명한 고전에서 인용하여 넣은  부분이었다. 또한 이번에 출간이 예정된 신작에서 가장 첫번째 장에 들어갈 시이기도 했다. 그것까지 생각하자, 그녀가 무슨 뜻에서 이야기를 한 것인지 눈치채고 이마가 확 붉어졌다. 야니에가 또박또박 말했다.

 

     "너, 평소라면 다른 부분을 인용했을 텐데. 물론 이 시만이 아니야. 이번 시선詩選에 들어갈 것 대개가 그래. 네 녀석도 나이를 먹어서인지 취향이 제법 변했구나 싶었더니."

     "그, 그것은…… 워낙에 고전적으로 아름다운, 적확한 수사법이……. 또, 한 적 없는 시도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야. 바보 녀석."

 

어쩐지 변명처럼 주섬주섬 이야기하자 야니에는 가볍게 일갈한 뒤, 다시 본래의 일―책을 들여다보는―로 돌아갔다.

 

     "말은 불변하지도 무한하지도 않아. 그런 것을 네 좁은 기준 안에 가둬두려고 할 필요는 없어. 그럴 수도 없고. 몇 번이고 말했으니 잘 알고 있겠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붙잡는 방법은 여럿이다. 네가 쓰고 싶은 것을 찾았다면, 어떤 바람이 불었든 상관 없어."

 

그녀가 말하는 방식은 보통의 귀족들 같지도 않고, 빙빙 돌지 않고 곧바로 쨍쨍 전해져 오는 것이 타낫세에겐 언제나 낯설었다. 그렇지만 그런 만큼 이야기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가는 종류였다. 타낫세는 수긍하듯 고개를 숙이고, 야니에가 내려놓은 원고지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그대의 영원한 여름은 퇴색하지 않고, 그대가 지닌 미는 잃어지지 않으리라.*

 

사랑이라는 감정을 시작詩作에 있어 소재로 삼은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듯 손끝에 스치는 관념을 무엇을 통해 붙잡았는가. 영원한 여름을 누구에게서 떠올렸는가. 그것은 백작의 말처럼 연원이 분명했다. 레하트로 인해 제게는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사소하게는 이름부터, 더욱 큰 범주로는 제 삶 자체에. 그리고 제 '말'에 찾아온 변화 역시 분명했다. 달이 바뀔 때 불어오는 바람처럼 살갗에 스며들어, 바람 속에 선 자신으로서는 변화 자체를 명확히 인지할 수는 없어도, 그러한 사실이 꽃봉오리를 흔드는 것처럼 확연하다는 것만큼은 뚜렷이 알 수 있었다.

 

글자 위를 손끝으로 훑고 있으니 희고 가는 손가락이 그 위로 살그머니 올라왔다. 레하트는 기쁜 듯한 미소를 지은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이러한 온기였다. 제 말에 스며든 것은. 때문에 확신을 갖고 그녀의 손을 맞잡을 수 있었다.

잠시 흐른 침묵을 깨듯, 야니에가 말을 꺼냈다. 이번 질문의 방향은 레하트를 향해서였다.

 

     "……저 녀석과는, 왕성에서?"

     "네."

 

레하트는 시원스레 대답했다. 야니에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곤, 종이 몇 장을 팔락팔락 넘겼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타낫세는 처음 야니에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을 때와 같이 초조한 마음으로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구애의 말 같은 건 못 가르친다고 했었는데."

     "타낫세가 백작님께 그런 부탁도 드렸었나요?"  레하트가 즐거운 목소리로 질문해서 타낫세는 무어라 반박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백작이 재밌다는 어투로 대답했다.

     "뭐, 어떻게든 해낸 모양이지만."

     "지난번에 타낫세가 써준 편지가 있어요. 마지막에 적어준 문구가 무척 아름다워서 좋았는데. 아, 가지고 올 걸 그랬네요."

     "너, 너는 지금 무슨 이야기를……."

 

타낫세는 횡설수설 되물었다. 우물쭈물하는 제 모습을 보고 야니에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분명 나중에라도 놀리고 싶어서 그러는 것일 테다. 옆에서 레하트는 해맑고 순진무구하게 웃으며, 선물로 가지고 온 과자의 포장을 풀었다. 저희 요리사가 솜씨가 좋아요, 덧붙이고는 특유의 태연자약한 태도로 야니에의 앞에 과자를 들이밀었다. 타낫세의 앞으로도 하나가 왔다. 그녀는 받아들려는 제 손가락을 부드럽게 밀어내고는 타낫세의 입에 하나를 물렸다.

 

     "왜, 타낫세? 틀린 말은 아닌 걸. 내가 받고서 얼마나 기뻤는지 알아?"

     "그렇다면 나중에 한 번 가져와 봐. 저 다람쥐 같은 녀석이 적은 연시라니 궁금한걸." 

     "그러면 나중에 책으로 낼 수도 있을까요?"

 

야니에라면 제 글이라면 전부 꾸밈없이 보아주는 사람이니 걱정할 것은 없겠지만……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이 사람은 그 높은 학식과 비례하듯 성격이 나쁜 구석이 있어, 그것이 문제였다. 디레마트이의 위신…같은 것은 애초에 그다지 없었지만, 그리고 레하트와 주고받은 편지는 정말로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들이라서 책으로 내서 소장해도 좋겠다 생각했지만, 야니에의 무신경함과 레하트의 실행력이 합쳐지면 정말로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이 다소 두려웠다. 타낫세는 다급히 둘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애썼다.

 

     "스승님, 일단 이것부터 드시고 말씀을……!"

 

…그런 식으로, 그날의 방문은 몹시 온화하게 흘러갔던 것이다.

 

 

 


*But thy eternal summer shall not fade,

Nor lose possession of that fair thou ow'st;

 

 

*그라드네라에 계절이 딱히 없는 건 알지만... 영원한 여름을 쓰고 싶었어요 (어쩌라고)

  1. 셰익스피어, <소네트 18> (피천득 옮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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