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백 포함 3,821자
* 카모카테 타낫세/레하트 애정B엔딩 기반
* 신청자님 개인 설정을 기반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입니다^^.
"타낫세, 진짜 많이 변했네."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던 바일이 툭 내뱉었다. 왕의 위엄은 저만치 내려둔, 꼭 후보자 시절과 같이 가벼운 말투였다. 피아칸트 왕성, 내빈실에서는 어른 셋, 아이 하나로 이루어진 다회茶會가 이뤄지고 있었다. 누군가 안을 들여다보았다면 그 참석자 중 하나가 이 나라의 유일한 왕이라는 점보다도, 어린아이가―그것도 왕이 아닌 다른 총애자의 아이가―있다는 점에서 놀랐을 것이다. 혼인도 하지 않았고, 새로운 총애자도 나타나지 않은 6대 치세의 왕성에서 어린아이를 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거기다 그 아이가 바로 그 타낫세 란테 요아마키스의 아들이라는 점까지 안다면 더욱 놀랐을지도 모른다.
그 어린아이는 지금, 제 아버지 되는 이의 뒤에 숨은 채 쭈뼛대는 중이었다. 숨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예 바짓자락을 꼭 움켜쥔 채 시선만 흘끗흘끗 던지고 있었다. 레하트를 닮아 새까만 머리카락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더 인상적인 부분이 있다면 바로 타낫세였다. 바일은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변했지? 응. 변했어."
"……변한 게 아니라, 당연히 그런 거다."
바로 그 타낫세는 바일이 무슨 뜻에서 그리 말했는지 알겠다는 듯 가볍게 대꾸하며, 제 옷깃을 붙잡고 매달린 아이의 정수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누가 봐도 사랑이 묻어나는 손길이었다. 아이는 제법 아버지를 따르는 모양인지 그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옆에 서 있던 레하트는 그 광경이 익숙한 것인지 그저 싱글벙글 웃으며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와서 인사 해야지, 테레하?"
타낫세가 다정히 어르는 목소리에, 아이는 쭈뼛거리며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면서도 타낫세의 바짓자락을 꼭 잡아서 쥔 손가락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새까만 머리카락으로 덮인 조그마한 머리통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어물어물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폐하. 테레하 요아마키스 페넷입니다……."
인사를 마치기 무섭게 다시 제 아비 뒤로 쪼르르 모습을 감추었다. 타낫세가 부드럽게 말했다.
"수줍음이 많아서 그래. 자, 테레하. 앉자."
"그런 것 같네. 누구를 닮아서일까."
바일이 키득대며 테이블 위에 턱을 괴고 말했다. (…왕답지 않은 태도에 뒤에 선 시종장의 얼굴이 뭔가 이상한 걸 씹은 듯 잿빛으로 질렸으나 왕은 알 바가 아니었다.) 바일의 입가에 걸린 미소 역시 평소의 엄격한 왕이 아니라 후보자 시절 소년의 모습과 가까웠다.
"나, 기억은 하고 있을까? 엄청 작을 때 봤었지."
"국왕 폐하라고, 아빠……가 아니라 아버님의 사촌이시라고, 그랬어요."
테레하는 나름대로 왕의 앞이라고 경칭까지 붙여가며 또박또박 대답했다. 아이답게 앙증맞은 이목구비는 타낫세를 면면이 빼닮아, 그 짙은 머리색만 제외한다면 작은 타낫세라고 불러도 될 듯싶었다. 눈동자의 밝은 빛깔 역시 그 부모의 것과 꼭 같아서―타낫세와 레하트는 서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이임에도 밝고 푸른 눈동자만큼은 거울처럼 똑같았다―어떻게 봐도 그 둘의 자식 같아서 신기했다. 레하트가 타낫세와 혼인을 하겠다고 처음 알렸던 때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광경이라, 바일로서도 제법 새로웠다.
"맞아. 너한테는 당숙…이 되려나? 엄밀히 말하면 아니지만, 뭐, 대충은 맞기도 하고. 그렇게 부르니까 정말 나이 먹은 것 같네. 틀린 것도 아니지만."
바일은 거기까지 말하곤 시종을 불러 차 준비를 시켰다. 그러는 동안 타낫세는 자연스럽게 테레하의 자리를 살피고 옷가지를 정리해주고 있었다. 아이는 당연히 유모나 시종이 붙어서 시중을 들겠거니 생각했는데, 타낫세가 사소한 부분까지 직접 돌보는 모양이었다. 별다른 말이 없는 것을 보니 레하트에게도 자연스러운 광경인 듯했다.
다과로 나온 것은 많이 달지 않은 과일 조림과 잼, 생크림, 작은 스콘 등이었다. 바일은 레하트와 잡담을 시작했다.
"왕성에는 오랜만에 왔지 않아? 머물 곳은, 역시 요아마키스 저택?"
"곧바로 록차를 타고 돌아가는 건 테레하한테도 힘들 테니까, 아무래도. 그리고 쿠렛세 님도 테레하를 귀여워하셔서……."
레하트는 쓰게 웃었다. 그녀의 시아버지와는 딱 그 정도의 관계였다. 혼인과 동시에 요아마키스라는 이름을 가운데로 밀어 넣은 탓도 있지만, 타낫세와 쿠렛세 사이 깊은 골은 ―아이가 생긴 이후로 조금은 부드러운 분위기가 되었다고 해도― 좀처럼 나아질 기미 없이 정체된 상태였다. 레하트 역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이 나설 일이 아니라 생각했고, 그런 탓에 왕성에 방문할 일이 있거나, 행사라도 있는 것이 아니면 얼굴을 보는 일도 적었다. 눈치가 빠른 바일은 금세 다른 곳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러는 동안 타낫세는 테레하의 작은 입에 열심히 간식을 채워주고 있었다. 아이가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접시에 놓아주는 것이며, 입가에 묻은 잼을 닦아주고,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손길이 여간 능숙한 것이 아니다. 원래도 거칠기보다는 섬세한 구석이 있는 인간이라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제 사촌 형이었던 사람이 육아를? 바일은 그렇게 되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바일이 그러거나 말거나 타낫세는, 제 아들에게 열심이었다.
"아가, 고개를 이쪽으로 돌려볼래? 깨끗이 닦아야지."
"네에."
"잘했어. 자, 이것도 먹어보자."
그리고는 작은 과일 조각을 포크로 집어 먹여준다. 테레하는 얌전히 받아먹었다. 어미 새가 모이를 주는 광경 같기도 했다. 달콤한 것을 먹자 아이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둥실둥실 떠올랐다. 아이가 웃자 타낫세도 따라서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마 자신도 모르고 한 행동이었으리라.
"헤에, 정말이지. 타낫세 엄청……."
젊은 왕은 재미있다는 듯 그렇게만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타낫세는 제가 알던 사촌 형보다는 '아버지'라는 개념과 가까운 모습인 것이 보면 볼수록 의외였다. 물론 제 아들에게 푹 빠져 자신에게 대답도 하지 않는 타낫세 대신 레하트가 그의 말을 받았다.
"변한 게 아니야. 타낫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거든."
지금의 이야기뿐 아니라 아까의 말까지도 받은 대답이었다. 레하트 역시 타낫세가 그의 아들을 보는 시선과 마찬가지로 사랑이 담뿍 담긴 눈빛을 하고 있었다. 바일은 '알겠다, 알겠어' 하고 어깨를 한 번 으쓱 치켜올렸다. 어쨌거나 둘은 서로에게서 좋은 점을 발견하여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일 테니까. 그중에서 자신이―그와 가족으로서 얼마나 긴 시간을 함께 어울렸다고 하든지―알지 못하는 게 있다고 하여 놀랄 일은 아니다.
바일은 테이블 앞쪽으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그리고 과일을 오물대는 중인 테레하를 향해 질문했다.
"그거, 이번에 서쪽에서 들어온 과일인데 어때?"
"맛있어요! 엄청 달고 부드러워요. 또, 또, 시원하구요…."
"그치? 좀 더 있으니까 가져가서 먹어. 아마 디톤에서는 못 구하는 과일일 걸."
뒤에서 대기 중이던 시종장을 불러, 미리 준비해놓았던 상자를 전하도록 했다. "공물로 들어왔을 텐데, 이렇게 빼돌려도 되는 거야?" 레하트가 농담처럼 묻자 바일은 씩 웃었다. "당연하지." ("……이것은 폐하께서 총애자 님을 위해 따로 구매하신 물건으로, 바일 폐하는 공명정대하고 청렴하신 분이기에 ○◆Χ□……." 바일과 레하트는 구구절절 이어지는 시종장의 아첨은 모른 척했다.) 그제서야 타낫세는 바일을 향해 고개를 들고 말했다.
"고맙다, 바일."
"그래, 그래―."
"테레하도 감사합니다, 해야지?"
"감사합니다!"
삼 초 만에 자신은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바일은 사촌 형을 향해 놀리듯 혀를 삐죽 내밀고 싶은 충동을 겨우겨우 참을 수 있었다. 자신은 왕이고, 거기에 제 오촌뻘 되는 꼬마까지 눈앞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관심을 빼앗겼다 해서 어린아이에게 질투하거나 한 것이 아니고 그냥 제 사촌 형의 모습이 정말로 신기해서였다. 신기해서.
아무튼, 그렇게 넷이서 함께한 다회는 바일이 재무 담당 문관으로부터 방해를 받기 전까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