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백 포함 4,624자
* 카모카테 타낫세/레하트 애정B 기반
* 유리리에라는 인물 자체를... 처음 써보는 듯한데 재밌었어요~!
새로운 도전을 가능하게 해주시는 신청자님 항상 감사합니다.
"……처음에 소식을 듣고는 무척 놀랐답니다. 레하트 님이 그 엄청난 바보 씨를 고르실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왕성 의상실에서는, 화려한 옷감과 장신구들이 촛불을 받아 빛나고 있다. 얇은 부채를 손에 쥔 유리리에는 그 호화스럽기까지 한 풍경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그녀가 부채를 팔락팔락 흔들며 무척 즐거운 목소리로 질문했다.
"후후. 약혼을 축하드려요. 기분이 어떠신가요?"
"…부끄럽게도 무척 행복해. 그리고 축하 고마워, 유리리에."
그러니까, 타낫세와의 사이를 공언하게 된 것―약혼이 지난 달의 일이었다. 약혼식 자체를 공개적으로 올리진 않았다지만 왕성은 크기에 비해 소문이 쉬이 도는 곳이었고, 더군다나 그 대상이 두 번째―계승권을 포기한 지금은 전前이라고 말해야겠지만―총애자와 선왕의 아들이니 사람들의 관심이 몰려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엄밀히 말하면 두 번째 약혼이었지만. 레하트는 속으로 그리 정정했다. 공교롭게도 두 번의 혼약 모두 같은 상대와 맺은 것이다. 그러나 이번 약혼은 남을 속이고 이용하기 위한 도구로서가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맺은 진정한 가약이었다. 사랑하는 이와 맺어지는 특별한 날이니 자신은 모든 면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오늘은 그날 입을 예복을 맞추는 날이었고, 레하트는 적절한 조언자가 필요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꽤 오랜만에 편지를 했는데 선뜻 나와준 것도 고맙고 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적임자로 유리리에 말고는 아무도 떠오르지 않았거든."
평소 친교가 적은 사이였기에 응해줄지 확신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유리리에는 쿡쿡 웃으며 우아하게 응대했다.
"별 말씀을요. 레하트 님께서 제 능력을 믿어주신다는 뜻이니 저는 무척 기뻤답니다?"
주변에는 갖가지 원단과 레이스, 리본과 소품들이 빼곡했다. 시제품으로 만들어진 옷들 역시 자르르 윤기를 뽐내며 긴 행거에 걸려 있었다. 유리리에는 주변에 놓인 것을 둘러보다 들고 있던 부채로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레하트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피아칸트에서 가장 화제가 된 사건인 걸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저 역시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 바보 씨의 어떤 면이 좋으신 건지 말이에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주변에서 보기엔…… 그런 일도 있었으니까."
레하트는 쓰게 웃으며 작년의 일을 떠올렸다. 작년이라고는 하나 꼭 아주 오래전의 먼일 같았다. 자신과 타낫세 모두의 삶이 바뀌는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 자체를 뒤엎고 재정의한 일이기도 했다.
"약혼이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고 해도 모두 이해했을 거예요. 다행히 백모님께서 쓸모없는 소문은 엄중히 단속하신 탓에 그 일에 대해선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라 생각하지만 말이지요."
"……."
"레하트 님, 저는 레하트 님의 '선택'에 대해 의문을 표하려는 것이 아니에요."
유리리에는 질감을 확인하려는 듯 붙잡았던 옷의 소매를 놓고는, 이쪽을 돌아보며 짐짓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털어놓듯 속삭였다. 요염한 미소가 앙증맞은 입가에 슬쩍 어렸다가 사라졌다.
"사랑이란 건 두 사람의 일.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만의 일이에요. 밖에서 들여다보기만 해선 모르는 일이니 이렇다, 저렇다, 떠드는 입이 많은 것도 사실이에요. 저는 어느 쪽이냐 하면…… 항상 빤한 이야기보다는, 그렇지 않은 쪽이 지켜보기에도 즐겁다는 쪽이에요."
"유리리에, 재밌다고 생각하는구나?"
"네. 몹시."
유리리에는 종을 울리듯 소리 내 웃고는, 부채로 살그머니 입가를 가렸다.
"……그래서 레하트 님. 이런 이야기도 좋지만 오늘 만남의 목적으로 돌아갈까요? 마음에 두신 옷은 있으신가요?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드는 일도 좋지만, 저는 이전의 것을 본떠서 만들거나 참고해서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유리리에는 부채를 착 소리가 나게 접고는, 각양각색의 옷가지를 향해 돌아섰다. 레하트는 곁의 토르소에 걸린 옷가지를 어루만졌다. 성 아래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드레스는 나비처럼 가볍고 무척 부드러운 질감이었다. 가장 좋은 물건들이 모이는 왕성이라지만, 평소보다 힘을 준 듯 느껴지는 것은 착각이 아닌 듯싶었다. 모처럼의 경사에 각지의 상단이 줄을 대러 올라왔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그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레하트는 자개단추를 엄지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일단."
"일단은?"
"타낫세의 의복과도 잘 어울리는 형태면 좋겠고, 또…… 두르는 천이라거나 감싸는 천이 많아서 하늘하늘한 느낌이면 좋겠어. 장식은 화려하기보단 수수한 편이 좋은데……."
"으음. 좋아요. 두 사람 것을 같이 염두에 두어야겠군요. 일단 레하트 님은 선이 가늘고 아름다우시니 우아한 형태에, 밝은 빛깔을 많이 사용하면 좋겠어요."
유리리에는 신중하게 거닐며 의상을 살폈다.
"소매는 드러낸 것, 허리띠가 긴 것…… 확실히 이것도 좋고, 저기 걸린 저것도 좋아 보여요. 레하트 님은 어느 쪽이 마음에 드시나요?"
"색은 이쪽이 마음에 드는데, 저런 형태가 전반적으로 더 나은 것 같아. 그렇지만 나는 이런 색은 입어본 적이 없어서……."
"확실히 차분한 색을 선호하셨던가요. 이것도 무척 아름다운 색이지만, 모처럼 중요한 날이잖아요? 그리고 레하트 님의 눈동자는 그 녀석과 꼭 닮은 빛깔이니, 이 정도 (유리리에는 과감한 손길로 원단 몇 가지를 짚어냈다) 밝은 푸른색은 두 사람에게, 그리고 분위기와도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요."
색을 정하고 나니 그다음은 재질, 다음은 단추, 재봉선, 자수, 소품과 장식…… 그런 식으로 계속 이어지는 것이었다. 전부 새로 짓게 될 것이었기에 예산도 품도 상당히 들어갈 터였다. 간신히 담당 시종에게 결정된 사항을 설명하고 나니 두 사람 모두 목이 말라 냉차를 청하게 되었다. 시종이 열심히 도안이며 하는 것을 그리는 옆에서, 레하트는 찻잔을 든 채 우물쭈물 말했다.
"타낫세도 좋아할지 모르겠어."
"………그 바보 씨는 레하트 님이 뭘 입어도 비슷한 반응일 거예요. 장담하죠."
"진짜로 그럴까…?"
"그럼요. 보고 쓰러지지나 않으면 다행일까요."
유리리에는 조금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이지, 그런 녀석의 어디가 좋아서 혼인까지 결정하셨는지.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답니다."
레하트는 그저 웃었다. "사랑하니까 그래." 차를 마시다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되물었다. "…유리리에는 그럴 생각 없어? 결혼 말이야."
얼핏 유리리에가 지금 만나는 이가 있다고 들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러나 굳이 그 소문을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그녀가 흩뿌리는 염문은 왕성에선 모래처럼 흔한 것이긴 했지만 그런 이야기를 당사자 앞에서 꺼내지 않을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안 그래도 레하트 님이 시작을 끊으신 뒤로 제 나이대의 귀족은 전부 바빠졌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유리리에는 레하트가 어째서 그런 이야기를 꺼낸 지 알겠다는 듯 부채 끝으로 턱을 살포시 짚었다. 꼭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여상한 말투였다.
"저희 가문에서도 제 거취에 대한 이야기가 슬슬 나오는 참입니다만, 요아마키스에는 이미 경사가 하나 있으니까요. 제게는 아직 부담을 주지 않고 계신답니다. ……그리고 저로서도 아직 생각이 없어서요. 개인적으로, 제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는 이를 아직 찾지 못했거든요."
"원하는 것?"
눈을 둥그렇게 뜨고 되묻자 유리리에는 눈을 둥글게 휘며 화려하게 웃어 보였다.
"네."
"그게 뭔데? 물어봐도 될까?"
"후후…… 상당히 적극적으로 찾는 중이라는 것만 알려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자, 그럼 다음 일정에 대해 의논할까요? 유리리에는 깔끔하게 대화를 마무리한 뒤, 기세 좋게 자리에서 일어나 담당 시종에게 말을 붙였다. 이번에는 타낫세의 의복에 대한 이야기였고, 레하트 역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느라 유리리에와의 짧은 대화는 곧 잊어버리게 되었다.
"어때? …혹시 별로야?"
레하트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타낫세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드디어 가봉을 마친 의복과 장신구를 확인하는 날이었다. 진작 시종이 매무새를 정리해주고서 물러났음에도 타낫세는 왠지 모르게 잔뜩 경직된 얼굴이었다. 모르는 이가 봤으면 어디 아픈 게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로.
"타낫세?"
"아, 음……."
되묻자 허둥지둥 시선을 피하기까지 했다. 역시 별로인 것일까? 레하트는 제 차림새를 슬그머니 살폈다. 역시 천의 색깔이 자신에게 안 어울리는 종류였나……? 의복이나 장신구에 관한 건 대부분 유리리에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만들었지만, 또 사소한 부분에서 고집을 부리기는 했다. 이를테면 장신구 중에서도 지금 이 귀걸이 같은 것. 다들 혼인 기념이니 유행을 따라 새로 맞추길 권했지만, 자신은 이전에 타낫세에게 선물 받은 이 귀걸이만 있으면 된단 이유로 예물의 폭도 대폭 줄이고 장신구도 이 귀걸이에 맞추어 제작했더랬다. 아무리 그래도 지나치게 수수한 편이었나? 불안한 마음을 감추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직 다 완성된 건 아니니까……."
"그, 그게 아니라……!"
말까지 더듬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타낫세는 귓가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었다. 기세 좋게 일어서긴 했지만, 어떻게 할 지는 모르겠는지 시선이 어린 양처럼 마구 흔들렸다. 타낫세가 어물어물 내뱉었다.
"그, 그런 게 아니라…… 네가 너무 아름다워서, 바라보기 아까울 정도라 그런 거니까……."
"에헤헤, 그렇구나."
"정말이지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아……."
레하트는 순식간에 긴장이 풀려 활짝 웃을 수 있었다. 그 뒤로도 이어진 타낫세의 찬사를 아낌없이 받아들였다. 마치 이 자리에 없는 유리리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것 보세요. 제가 쓰러지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