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20
커미션//틴&레

*공백 포함 5,573자

*카모카테 타낫세/레하트 애정B엔딩 기반의 틴-레 대화

*신청자님 개인 설정이 있는 레하트가 등장합니다!


 

 

 

성산에 꼭 맞닿은 고대 신전은 디톤 전체에서, 아니, 그라드네라 전역에서 가장 위용을 떨치는 건물이라고 칭할 만 했다. 록차에서 내린 레하트는 신전의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아네키우스에 대한 수천 년간의 믿음이 쌓아 올린 견고한 성채―실제로 성城은 아니라지만―은 꼭 그에 비견될 만큼의 장엄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곳에 드나드는 것은, 비록 가까운 친구를 만나러 가는 일이라 해도 발걸음에 다소 조심성을 실어주기엔 충분했다.

 

 

피아칸트에서 나온 지도 일 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제는 타낫세 요아마키스 페넷이 된 그―와 혼인을 올린 지도 어언 일 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디톤 근방의 영지를 받아 내려오게 된 이후 신전에 방문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 발걸음에 기쁨과 반가움이 담긴 것은 아마도 최초였다.

 

 

오늘 디톤 방문은, 틴트아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원래는 방문 시 여러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것 같았지만, 약속의 상대가 아무래도 차기 신전 의원으로 유력한 후보인 탓인지 무난히 허가를 받아 들어오게 되었다. 영주의 신분으로 방문했을 적에도 받지 못한 편의라 생각하니 입가에 잠시 쓴웃음이 어렸다.

신전에 들어서자마자, 이마의 선정인에 잠시 시선이 쏠리는 것을 눈치챈다. 곧바로 견습 신관 하나가 뛰쳐나와 안내를 맡는다. 아마도 오늘 방문이 미리 전해져 있던 탓이겠지만, 역시나 상당한 환대라는 것은 알 수 있다. 문득 이런 상황에서까지 길어지는 상념들을 고개를 흔들어 떨쳐내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몇 걸음 갈 것도 없이 그녀가 찾고 있던 사람과 마주쳤다. 아마 그 이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상대를 알아보자마자 이쪽으로 빠르게―결코 빠르다고는 할 수 없는 속도였지만, 그래도 반가워 하는 중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걸어왔다. 틴트아였다. 기다란 신관 의복이 휘적휘적 날리는 모습을 보고 레하트는 슬쩍 웃음을 삼켰다.

 

안내를 맡았던 신관은 틴트아에게 꾸벅 목인사를 한 뒤 종종걸음으로 돌아갔다. 틴트아는 사실 그보다도 자신이 우선인 것 같았다. 가벼운 손길로 답싹 손목을 붙잡은 그는, 확인하듯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오묘한 적자줏빛 눈동자가 요모조모 살피듯 얼굴 위를 오랜 시간 오가더니 이내 얼굴 한가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응. 정말로 레하트야."

 

레하트는 어쩐지 변함없는 그의 모습에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는 아름다운 낯 면면에 밝은 미소를 띠고 있다가, 제 웃음이 의아한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레하트는 웃음을 참고 입을 열었다.

 

   "디톤에 온 걸 환영해, 틴트아."

 

장소가 장소인 탓에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나, 틴트아로부터 편지를 받았을 적부터 생각해두었던 인사였다. 아무리 디톤이 신전의 근거지라 해도 따지고 보면 자신이 먼저 디톤에 와 있던 셈이니까. 틴트아 역시 제 말을 이해했는지 손목을 놓고, 제대로 손을 붙잡아왔다.

 

   "오래간만이야. 저번, 혼인 의식 때 왕성 신전에서 본 게 마지막이었으니까……."

   "먼저 연락 못해서 미안. 편지라도 쓸 걸 그랬는데."

   "그동안 직접, 얼굴 보고 이야기하고 싶은 게 많았어."

 

손을 놓아준 틴트아는 느릿한 걸음으로 앞서 걸으며 안내를 시작했다. 신관들이 머무는 곳은 생각보다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디톤의 고대 신전의 내부까지 들어오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딱히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레하트는 그를 따라 이동하며, 오가는 신관들의 시선에 깔린 기대 어린 눈치를 모른 척 하려 애썼다. 틴트아의 방에 도착하자 그는 우선 질문했다.

 

   "그러면…… 차라도 마실래? 과자 같은 건 방에 없지만…… 말하면 가져다줄 거야." 

   "으응, 번거롭지 않아? 차로 괜찮아."

 

아무래도 틴트아가 직접 차를 준비할 요량이었다. 자신은 테이블에 앉아 기다리게 하고는, 찻주전자며 찻잎이며 하는 것을 다소 위험하게 덜그럭거렸으나 곧 무사히 두 개의 잔을 들고 돌아왔다. 내민 찻잔에 담긴 액체는 자신의 것과 그의 것 양쪽이 고르지 않고 그의 행동에선 어쩐지 허둥대는 티가 났다. 여전히 남을 대접하는 것에는 서툰 것 같아, 레하트는 약간 웃음이 났다. 일 년이나 떨어져 있던 이에게서 변하지 않은 모습을 발견하는 건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그러면 틴트아 님, 이제 계속 여기에 있는 건가요?"

   "메노히아 씨의 생각에 달렸지만, 아마도."

   "그러면 자주 볼 수 있겠다! 왕성에서 지낼 때만큼은 아니겠지만."

   "레하트가 원하면 언제든 와도 좋아……. 으음. 레하트……는 여전히 신전에 오는 것, 좋아해?"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이자, 틴트아는 희끄무레하게 웃었다.

 

   "응. 다행이다. 싫어졌으면 어떡하지 싶었어."

 

신의 길로는 들지 않았으나, 총애자 시절에는 제법 자주 신전에 오갔었다. 틴트아와의 친분도 그곳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때를 떠올리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정해진 시간보다 짧게 우린 것인지 조금 맹맹한 맛이 났지만, 그럭저럭 마실 만했다. 건너편에서 틴트아도 차를 홀짝여서, 문득 짧은 침묵이 흘렀다. 레하트는 오늘 방문의 목적을 기억해냈다. 허리끈에 묶어두었던 향 주머니를 끌러 테이블 위로 올렸다.

 

   "이거, 빌려줘서 고마웠어."

 

받아달라고 내밀자, 틴트아는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았다.

 

   "아. 그때의……. 레하트가 계속, 가지고 있어도 되는데."

 

이전에 살던 마을엔 오래된 속설로, 혼인을 올리는 날 남에게서 빌린 것을 가지고 있으면 행복해진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일 년 여 전, 결혼식을 앞두고 지나가듯 이야기했었던 것을 틴트아가 용케 기억하고 '빌려'주었었다. 그때 돌려주었어야 했는데, 막상 식 이후로는 자신은 작위니 영지니 하는 일로, 틴트아는 신전의 인사이동에 대한 일로 몹시 바빠서 돌려줄 틈이 없었던 것 같다.

신전에서 자주 사용하는 향료로 배합된 그것은, 그 자체로는 특별할 건 없는 물건이었지만 틴트아 본인처럼 깨끗하고 정갈한 향을 품고 있어 종종 가까운 친구가 그리워질 때 꺼내 보곤 했었다. 아쉽게도 일 년이란 시간이 흐르며 처음의 향은 거의 빠져버린 탓에, 돌려주기 전에 새로운 향료를 채워 넣은 참이었다.

 

   "돌려주기로 했었잖아? 약속을 지키고 싶어서 그래."

 

레하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그의 손바닥에 주머니를 들려주었다. 틴트아는 희미하게 미소 짓더니 받아든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아마도 향이 달라진 건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때에도 말했지만, 틴트아가 그런 미신 같은 이야기도 진지하게 기억해줄 줄은 몰랐어."

   "레하트가 기분 좋아질 수 있는 일……이니까. 신이 아니라 사람의 말이라고 해도, 믿고 싶다면, 믿어도 된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런 게 없어도, 행복해졌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향 주머니를 내려놓은 신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해주고 싶었어. 레하트는 내 친구니까."

   "……응. 정말 고마워, 틴트아."

 

레하트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예전부터 이런 이유로 편한 친구 사이였다. 레하트는 이렇듯 틴트아의 적당한 온기와 거리감이 편했다. 수반에 고인 투명한 빗물이나, 둥그런 천장 새로 내리쬐는 햇살처럼 맑고 고요한 면모는 왕성의 사람들로부터는 찾기 어려운 것인 탓에 더욱 그러했다. 정말이지, 만나러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틴트아에 대한 소식을 알게 된 것은 며칠 전의 일로, 갑작스레 도착한 한 통의 편지에서부터였다. 정확하게는 레하트 자신이 아니라 타낫세가 받은 편지로부터였다. 슬슬 영주로서의 일에 익숙해진 레하트는 침실에서 의복의 정돈을 마치고 시종장과 오늘 일정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 타낫세는 자신보다도 일찍 일어나 먼저 준비를 끝내고 있었고.

그때 한 시종이 방으로 들어와 공손히 편지 한 통을 전해주고 갔다. 공적인 서신은 집무실로 가져다 두곤 했으므로, 시종들이 굳이 침실까지 가지고 온 것을 보면 아마 야니에 백작으로부터 온 편지이겠거니 했다. 요즈음 새 시집에 대해 논의 중이기도 했고……. 아마 타낫세가 불쑥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너와 가까이 지내던 신관. 이번에 디톤으로 왔다는 것 같아."

   "틴트아 말이야? 정말로?" 레하트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되물었다.

   "그래. 파다 가문의. 스승님이 적은 것이니 아마 확실하다고 생각한다만."

 

안 그래도 영지가 디톤 인근에 있는 탓에 내심 기대하고 있었던 일 중의 하나였다. 이 나라의 모든 신관들은 언제든 한 번은 모든 신전의 근거지인 디톤으로 가게 된다고 하니까. 혼인 의례 이후로는 제대로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채 영지로 내려온 탓에, 더욱 아쉬운 마음도 있었다. 그게 벌써 일 년 전의 일이었다. 그간 여러 핑계로 연락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에, 그의 소식을 듣게 되어 기쁜 마음과 동시에 미안한 감정이 미미하게 차올랐다. 그러한 기미가 제 얼굴에 스쳤는지, 타낫세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레하트. 만나러 가는 게 어떻겠어?"

 

레하트는 우물쭈물 대답했다. 시종장은 둘의 대화가 개인적인 이야기로 옮겨갔다는 것을 눈치채고,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그렇지만, 그동안 연락도 못 했는데 갑자기 찾아가는 건 좀 미안하고……."

   "그 신관이 그런 것에 신경 쓰는 사람 같지는 않던데."

   "아직 처리하지 못한 영지의 일도 많고……."

   "정무 때문이라면 도와줄 수 있어. 우리의 영지이기도 하니까, 나한테 맡기게 되었다고 해서 부담 갖지 않아도 괜찮아. 거기다 급한 일도 없지 않나?"

 

그렇게 말한 타낫세가 두어 번 헛기침을 하자, 시종장이 뒤늦게 대답했다. "예. 물론, 물론이지요." 하지만 고민에 빠진 레하트의 눈에는 딱히 들어오지 않았다. 두 손을 모아쥐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한참 괴롭히던 레하트가 결국 내뱉었다.

 

   "그리고…… 지금 타낫세랑 떨어지는 건 잠깐이라도 싫으니까."

   "그, 그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타낫세로부터 "너는, 아아, 정말이지"로 시작해서 "나도 너와 떨어지게 되는 것은 싫지만……" 옆에 시종장이 있다는 것도 잊고 "잠드는 순간조차 종종 아까워" "내 얼굴, 보지 못하게 되어서?" …… "금방 돌아올 거지?" "물론이야!" 같은 신혼 부부만의 대화를 나누고 나서야, 하여간 그날 아침의 논의는 끝이 났고, 레하트는 결국 타낫세의 이야기로부터 용기를 얻어 먼저 신전 쪽에 사람을 보냈다. 그 뒤의 일은 물 흐르듯 빠르게 진행되었고. 레하트는 그날 아침의 일을 회상하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앞으로는 편지 자주 할게. 물론 방문도 자주 할 테니까."

   "레하트는, 레하트야. 응. 분명, 자주 이야기하지 못 하더라도 믿을 수 있어."

 

틴트아가 고요히 웃었다. 레하트는 신관의 이러한 면모가 정말로 꽤 좋았다. 이렇듯 마음이 맞는 친구가 가까이 있으니 앞으로의 생활이 더욱 즐거워질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는지, 틴트아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했다.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 것 같네, 레하트."

   "그렇게 보여?" 

   "응. 보기 좋아."

   "에헤헤."

   "레하트의 이야기, 듣고 싶어. 차, 더 마실래?"

   "응. 대신에 차는 내가 내려도 될까? 선물로 주려고 가져온 게 있는데……."

 

그 뒤로는, 틴트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식사 시간이 되어 식사까지 함께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록차로 이동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 된 탓에 신전에 아예 머물게 되었고, 다음날에는 틴트아와 신전 예배에…… 그러다 아예 며칠간 머물고 가겠다고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 그렇게 홀로 페넷 저택에 남겨진 타낫세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집필 작업에만 몰두……하였다면 좋았겠지만, 영주 대리로 사흘 밤낮을 정무에 시달리고 말았다는 것은 페넷가家만의 자그마한 해프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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