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09
로니레하

*카모카테 로니카/레하트

*애정B 노선 타다가 ㅁㅁ권유 후 호애 반전 > 증오 루트 이후 이야기. (해당 루트 스포일러 있습니다.)

*포타에서 옮긴 재발행 글


 

 

 

 

 

 

   완연히 여인의 태가 나는 몸을, 거울 너머로 들여다봅니다.

 

 

   차양처럼 뒤로 드리워진 긴 머리칼. 둥그스름한 어깨를 밝은 빛깔의 천이 겹겹이 감싸고 떨어집니다. 장신구를 걸친 가늘고 하얀 목이 낯섭니다. 분화를 거치고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이 몸은 아직 남의 것만 같습니다. 드러난 목을 가리려는 것처럼 양손으로 감쌉니다. 그리고 손끝끼리 맞닿게 하여 목걸이를 만들려는 것처럼 구부리고, 손가락에 힘을 줍니다. 심장이 한 번, 두 번 뜁니다. 시종들이 놀라기 전에 손을 떼자 턱밑에 희미하게 붉은 자국이 남습니다. 

 

   칩거의 시간이 끝난 이후 저를 둘러싼 세계는 빠르게 변했습니다. 왕위의 계승을 위한 의식 준비부터 시작하여 교육과 정무에 이르기까지, 후보자에 지나지 않던 작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도가 세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입니다.

 

   바쁜 것은 왕위에 오를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귀족들 역시 너나 할 것 없이 새로 줄을 대며 아첨하기에 바빴습니다. 동시에 선물이라도 되는 양 비슷한 나이대의 자식들을 내밀어왔습니다. 열다섯, 열여섯, 많게는 열아홉, 스무 살 짜리 청년들. 귀한 집에서 잘 먹고 부족함 없이 자라 마치 광택이 나는 것만 같은 그들. 하나같이 값비싼 뇌물과 함께 하나같이 입에 발린 소리를 내고, 원조를 약속하며, 본인을 반려로 들였을 때의 이익을 우아한 어조로 전달하려 했습니다.

   우스웠습니다.

 

   강하고 설득력 있는 왕. 표면적으로 란테와 척을 진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것도 아닌 왕입니다. 새로운 란테 령의 주인은 두드러진 의사 표현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름 가운데에 리탄트를 밀어 넣었다고는 하나 그럴듯한 지지 기반은 없는 서민 출신의 왕. 내세울 것은 오직 자신, 두 번째로 나타나 오로지 능력만으로 왕위를 찬탈한 총애자.

 

   귀족들은 5대와 마찬가지로 비어있는 왕의 반려 자리를 얻음으로써 취할 수 있는 수많은 이득을 하나하나 헤아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후보자 선정 기간 동안 족히 몸이 달았을 테지요. 기필코 리리아노의 선례와 같은 일을 만들지 않겠다 의지를 다지며 어느 쪽에 줄을 대어야 할지 고민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왕배王配는 정치적 위상보다는 단지 반려자의 의미가 강했다지만, 란테와 조금의 피도 섞이지 않은 새로운 왕은 앞으로 어찌할지 모를 일입니다.

   그들이 숙고와 사려의 결과로 내민 것은, 가장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혼인의 계약입니다.

 

   리리아노는 이리 들어온 청년들의 처우를 전적으로 저에게 맡겼습니다. 시달리지 않으려면 빨리 결정을 내리는 것이 좋기야 하겠지만, 그렇게 운을 뗀 그녀는 말했습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압박이 되는 셈이야. 자네가 누굴 선택하든, 혹은 선택하지 않든, 그 사실만으로도 자네의 무기가 되는 것이지.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것도 좋지만… 무엇을 고르든 자네의 결정이라네. 나는 참견할 수 없겠군.

   그 자리에는 로니카도 함께 하고 있었고, 그날 저는 개중 제일 쓸모 있어 뵈는 사람에게 즉시 의사를 표했습니다.

 

 

   오늘은 혼인에 쓸 의복을 가봉하는 날입니다. 팔을 벌리고 선 저에게 여러 사람이 달라붙어 이것저것을 걸치게 하고, 핀으로 찌르고, 소품의 소재를 고릅니다. 사냐는 마치 본인의 결혼식이라도 되는 양 신나서, 잠자리의 날개처럼 얇고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내는 옷감을 이리 대고, 저리 대어보고 있습니다. 가벼운 분위기에 그녀를 따라 기분이 들뜰 만하건만, 거울 너머로 보이는 것은 무표정한 왕의 얼굴입니다. 저는 무심한 낯으로 내 모습이 비치는 거울을 바라봅니다. 거울 속의 저는, 너무 아름다우세요, 잘 어울리세요, 이런 칭찬들이 재잘재잘 들려와도 그저 차가운 얼굴입니다.

 

   혼인은 계승 직후의 혼란이 조금 안정된 새해를 전후로 올릴 예정이었으므로, 시기상 의복의 가봉은 이른 편입니다. 일이 이리 빠르게 진행된 것은 저의 독단이었습니다. 세간에서는 혼인 상대를 두고 지지 기반에 눈이 멀어 아무 귀족이나 잡았다느니, 그것이 아니라 이미 칩거 이전부터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느니, 알음알음 몰래 놀아났다느니, 제 결정을 두고 다양한 소문이 돌고 있었으나 알 바는 아닙니다. 혼약을 맺은 가문에서도 이런 소문을 잠재우랴, 국왕과 격을 갖추기 위해 새로이 하사받은 작위며 영지의 문제니 하는 것을 정리하랴 바쁠 테지만 그 역시 어쩐지 먼일이었습니다.

   아, 그것들에 대해 생각하니 머리가 아프고 짜증이 납니다. 

 

"―레하트님?"

"아아, 그래. 이것 말고 먼젓번의 그걸로 해줘."

 

   사냐의 말을 간신히 놓치지 않고 대답을 합니다. 아무래도 이런 얼굴은 이런 자리에선 맞지 않아 입꼬리를 올려보려 하지만 제대로 되지 않아 억지로 웃는 투가 납니다. 왕에게도, 혼인을 앞둔 이에게도 어울리지 않는 미소였기에 되레 입술을 앙다물고 말았습니다. 저의 심기가 엉망이라는 사실에 그들이 슬그머니 얼어붙는 걸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포기하듯 원래대로 표정을 되돌린 저는 손사래를 칩니다.

 

"다들 나가봐. 그리고 로니카를 들어오라 해." 

 

   저의 변덕에 사냐를 비롯한 의상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물러나가고, 그와 교대하듯이 늙은 시종이 방으로 듭니다. 

 

"로니카."

"예, 폐하."

 

   ―아이로서의 마지막 날 이후, 지금도 그는 저의 곁에 있습니다.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일도, 멀어지는 일도 없이 그대로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제가 바란 모습으로 여전히 곁에 있는 그를 어깨 너머로 훔쳐봅니다. 노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휨도 흔들림도 없이 곧게 시선을 내리깐 그는, 예의 바른 시종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거울에서 몸을 돌려 그와 마주하고 섭니다.

 

"어떤가? 평가를 좀 해줬으면 하는데."

 

   부러 가볍게 말을 붙여도 시종은 여전히 반응이 없습니다. 이는 왕에 대한 불충임을 알기는 할까요.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납니다. 그리고 그제야, 로니카는 입을 엽니다.

 

"이런 쪽에는 보는 눈이 없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무난하고 매끄러운 어투는 이전과 다를 바 없어 순간 강렬한 향수를 밀려오게 합니다. 네, 제가 아직 분화를 거치기 전의 어린아이였던 시절. 바로 그때를 말입니다. 반사적으로 언젠가 로니카가 가져다주었던 향 주머니가 떠올랐습니다. 희미한 들풀의 내음이 코끝에 감도는 듯합니다. 이제는 그것이 고향이 아니라 로니카를 먼저 떠오르게 한다는 걸, 그는 알고 있을까요.

   한 보만큼 떨어진 거리, 영원히 줄어들지 않을 그 거리에서 로니카는 그저 잠잠히 서 있습니다.

 

"뭐라도 좋으니 당신 의견이 궁금할 뿐이야. 마음에 드는지, 아닌지."

"그것이 중요한가요?"

 

   그의 목소리에 적의는 없습니다. (설령 모른척 감춘 것이라 할지라도 제가 알 수 있었을까요?) 저는 몸에 두른 빳빳한 옷감을 손으로 움켜쥡니다. 왕을 위해 진상된 것들은 항상 최상품입니다. 취향을 배제하더라도 객관적으로도 아름다운 것들뿐입니다. 바느질 흔적도 거의 남지 않은 천으로 만든 치마, 목깃에 밀어 넣어 망토처럼 두른 얇은 베일, 민가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고운 소재와 빛깔. 신부를 위해서도, 왕을 위해서도 부족한 것 없는 차림입니다.

   하지만 이 의복은 저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저는 답을 들을 의무가 있었습니다. 저는 로니카를 향해 반 발짝 다가갑니다. 잘 훈련받은 시종이 제 느린 움직임에 굳어지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는 물러나지 않고, 종전처럼 예의 바른 낯을 하고 있습니다.

 

"중요해. 그야 당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곤란하거든. 당신에게 이 옷을 입은 나를 보여주고 싶어서, 혼인을 받아들인 거니까."

"……."

"또한 누구보다 당신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었고."

"……."

"그리고,"

 

   로니카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잿빛의 눈을 하고 저만치 시선을 돌립니다. 듣지 못한 것으로 하겠다는 태도입니다. 하지만 나는 내뱉습니다.

 

"…당신을 여전히 사랑하니까."

"여전히 그 이유를 입에 담으시는군요."

 

   제 대답을 듣고 로니카는 아예 눈을 감아버립니다. 그를 제 수족으로 부린지도 어언 긴 시간이 흘렀고, 괴로운 기미가 눈썹 끝에 어리는 것을 눈치 못챌 리 없습니다. 보고 싶지 않은 광경입니다. 주먹을 꾹 움켜쥐고 도로 거울을 향해 몸을 돌립니다. 거울 속에는 왕이 있습니다. 여인이 있습니다. 제가 있습니다. 제가 선택한 모든 일들의 결과가 있습니다.

 

   일찍이 모든 것은 저의 결정이었습니다. 그에게 배반을 권유한 것도, 사랑한다는 말로 붙잡아둔 것도, 그의 세 번째 충성을 받아들인 것도, 결과적으로 이 아슬아슬한 거리에 만족하겠다 한 것도, 전부. 왕성에 도착한 이래 처음으로 가져본 제 것, 저의 사람. 갈 곳 없던 어린아이는 쉽사리 정을 붙이고 욕심을 갖고 사랑을 키웠습니다. 아, 감정이란 어둠처럼 끝을 모르고 깊어지는 것이지요. 저는 그 수렁에서 나올 길을 모르고, 성인이 되기 전의 마지막 해를 끝나지 않는 열병 속에서 헤매었습니다.

 

   알고는 있었습니다. 제가 당신에게 배반을 권유하지 않았더라도, 당신은 내 마음을 받아줄 리 없었을 것이고, 내 어린 시절의 치기도 이대로 끝이 났으리란 것을. ―그럼에도 저는 당신을 곁에 두고 싶었습니다. 돌이킬 수 없을지라도 당신의 전부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입니다. 저는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이 의복은 그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제가 잘라내어버린 어떤 미래에 대한, 의례입니다. 존재하지도 않았던 어떤 가능성에 대한 의식입니다. 저는 분명, 옷이 완성되는 날에도 로니카와 함께 하고 있겠지요. 저의 혼인식 날에도 가장 먼저,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함께할 사람 역시 그입니다.

   이것은 분명 가장 확실한 방식의 사랑일 텐데, 어째서.

 

"저는 그런 것은 잘 모릅니다. 폐하께서는 저를 곁에 두고 싶다 하셨지만 저는 단지 잘 벼린 단검과 같은 도구일 뿐입니다. 이마저도 언제 쓸모를 다할 지 모르지요. 쓰고 버릴 도구에 마음을 두지 마십시오."

"……."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만……."

"내가 언제 물러나도 좋다고 명령했던가?"

 

   고저 없는 음성은 저를 더욱 괴롭게 합니다. 로니카와 거울 속에서 눈이 마주친 것도 같습니다. …아, 정말이지, 당신의 앞에서는 언제고 아이인 척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화 후의 신체는 더 이상 아이의 태가 나지 않고 키도 자라서, 이제는 당신을 내려다볼 정도입니다. 아이였던 때의 흔적은 빠르게 녹아서 사라지고 없습니다. 영원토록 소년으로 머물러도 좋았으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소매를 붙잡고 매달려라도 보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유년기는 끝이 났습니다. 이제는 그때의 저도, 그때의 로니카도 없습니다. 저의 마음은 분명 그때와 같은데도.

 

   저는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갑니다. 등 뒤의 그와 한 걸음 멀어지지만, 차가운 거울과는 한 걸음 가까워집니다. 손을 뻗어 매끄러운 표면을 어루만지니 싸한 기운이 손끝에 어립니다. 가지 마. 여기에 있어. 거울 속의 인영이 입술을 달싹입니다. 불투명한 상像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는 것은, 이마에 자리 잡은 선정인 뿐입니다. 이제 보니 주제 넘은 욕심을 부린 제게 찍힌 화인火印 같습니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납니다. 이야기꾼에게서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요.

 

   불현듯 웃음이 나서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습니다. 아니, 왕답지 못하게 허리까지 굽힌 채 깔깔대다 간신히 몸을 추슬렀습니다. 눈가까지 문질러 닦으며 고개를 들자 어지러움이 느껴집니다. 어느새 다가온 것인지 로니카가 제 팔목을 붙잡고 바로 서는 것을 도와줍니다. 걱정이 된 모양이지요. 혼인을 앞둔 왕이 미쳐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요. 그가 말합니다.

 

"사냐를 불러오겠습니다."

"아니야, 나는… 괜찮아. 정말로 괜찮다."

 

   저는 고개를 도리질 치고, 박장대소하느라 흐트러진 숨을 꾹 참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아주 오랜만에 그가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것을 알아챕니다. 로니카와 곧바로 시선이 마주칩니다.

   언제고, 속내를 읽을 수 없다고 생각해온 눈동자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뚜렷하게―그의 안에서 몰아치는 감정을 품고 파도마냥 일렁이는 눈동자입니다. 불이 채 꺼지지 않은 장작을 재가 될 때까지 눌러 밟은 빛깔입니다.

   붙잡힌 팔목께의 섬세한 옷감이 늙은 시종의 손아귀에서 구겨집니다. 닿는 체온이 뜨겁습니다. 저는 그대로 놔둡니다. 평소 같으면 먼저 떨어져 나갔을 것이 분명한데, 오늘은 뿌리라도 내린 양 발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 그답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래도록 서로를 놓지 못하고, 저는 로니카의 단단히 아물린 입매, 굽은 눈썹, 해가 갈수록 늘어가는 세월의 흐름과, 제가 사랑했고 사랑하는 모든 것을, 그렇기에 상처 입혀서라도 가지고 만 것을 바라봅니다.

 

   문득 모든 일이 피곤해집니다.

   왕은 먼저 그를 밀어내고서 명령, 아니, 부탁합니다.

 

"됐다. 물러나라. 아니, 내가 볼 수 있는 곳에 있도록 해. 그냥… 그거면 돼."

"분부 받듭니다."

 

   단정하게 딱 잘라 떨어지는 그의 대답과는 달리, 시선은 저의 얼굴 위에서 오래도록 방황합니다. 그러다 이윽고 선정인으로 향합니다. 로니카가 다른 주인들에게서도 수십 년을 넘게 보아와 익숙할 그것으로. 깊숙한 곳부터 부드러이 빛을 내며, 신의 은총을 드러내는 왕의 징표 위로.

 

   신이 내린 관을 받은 나를 방해하는 이는 없습니다. 있더라도 조만간, 사라질 것입니다. 제 곁에는 로니카가 있으니까요. 저는, 제가 갖고자 한 모든 것을 가졌으니까요. 세상은 저의 뜻대로 흐를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대체 언제쯤, 당신에게서 미움을 받는 일에 익숙해질까요?

 

 

 

 


 

 

 

 

 

 

 

'Writings > KMK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커미션//틴&레  (2) 2021.06.20
로니레하/해짐작  (2) 2021.04.23
커미션//타나레하  (2) 2021.04.23
로니레하/여광餘光  (2) 2021.04.04
커미션//타나레하  (2) 2021.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