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23
커미션//타나레하

*공백 포함 6,014자

*카모카테 타낫세/레하트 애정B 엔딩 기반


 

 

 

   저는 페넷 저택에서 일하는 카라샤•이노=리카라고 하는, 열여섯 해 꼬박을 디톤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살아온 평범한 시종이랍니다. 작년부터 레하트 님과 그분의 반려이신 타낫세 왕자 전하를 모시고 있지요. 아마도 리탄트 전역에서는 표식을 지녔으나 왕이 아닌 분으로 유명하신 바로 그 분이시랍니다! 작년 초 국왕님으로부터 새로이 영지를 하사받으시어 이곳으로 오셨지요. 이전에도 왕성에서 생활하셨다 들었지만, 직접 데려온 시종이 많지 않다는 이유로 시골 출신인 제가 일하게 되었답니다. 그저 어련히 마을 근처의 조그만 귀족님을 시중들게 되겠거니, 생각하고 살아온 제게는 아주 상상도 못한 일이었지요.

 

   제 주인이신 레하트 님은 상냥하고 박식하시기가 이를 데 없는 훌륭하신 분이랍니다. 귀족님이시라지만 ―제가 글자를 읽을 줄 모른다는 점을 아시고는 직접 가르쳐주마고 하셔서, 지나가는 말씀일지라도 무척 기쁘다 생각했지만, 정말로 매주 바쁘신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제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쳐 주고 계신답니다! 이제 제 이름과 주인님 두 분의 성함 정도는 수월히 쓸 줄 알게 되었지요.

 

 

   오늘도 영주님께서 글자를 가르쳐주시는 날이었기에, 식사 준비에서 빠진 저는 레하트 님의 집무실로 향하는 복도를 걷고 있었답니다. 레하트 님의 집무실은 이 저택에서 가장 서책이 많은 동시에 연회장에 버금갈 만치 넓은 곳 중 하나로, 저로서는 전부 읽으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가늠도 되지 않을 만치 다양한 책과 문서가 꽂혀있는 곳입니다. 이전에 이 저택에서 기거하던 전前 관리가 기증하고 하고 간 서책이라나요. 또 레하트 님의 집무실이라 편의상 말하기는 하였지만 타낫세 님의 서재도 겸하고 있어 두 분께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장소 중에도 또 하나이지요.

   집무실 앞 커다란 문에 도착한 저는, 안에서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들려서 걸음을 멈추어 섭니다. 두꺼운 문 한 쪽이 빼꼼히 열려 있어 쉽게 음성의 주인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두 명의 주인님—레하트 님과 타낫세 님의 목소리입니다. (두 분은 사이가 아주 좋으셔서 시종들은 언제 아이 소식이 들려올지 궁금해하고 있답니다.) 어쨌거나, 저는 어쩐지 꼭 이래야만 할 것 같단 기분에서 저는 종이니 뭐니 이것저것 주워 담은 바구니를 품에 꼭 안고는, 다른 쪽 문에 바짝 붙었습니다. 풍경처럼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옵니다.

 

   "안돼, 타낫세. 곧 그 아이가 올 시간인 걸."

   "……조금 미루면 안되는 건가."

   "으응."

 

   레하트 님은 분화를 마치고 성인이 되신 지금도 무척 앳되어 보이시기에, 소년처럼 부드러운 말투가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듯했지요.

 

   "영주가 되어서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되겠어?"

 

   그리고 두 분께서는 조금 더 작고 내밀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속삭이시는데, 언뜻 듣기로도 상당히 마음 어디가 간질간질하여 귀가 쫑긋 곤두서려는 것을 참고 들리지 않는 척을 하고 있었지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콧노래까지 자그마하게 흥얼대고 있노라니 곧 타박타박 걷는 발소리가 들려 후다닥 몸을 바로 했지요. 문밖으로 나온 이는 타낫세 님이셨어요.

 

   "카라샤 이노 리카."

 

   제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자, 잠시 당황한 듯 시선을 천장에 두셨던 타낫세 님은 제 이름을 읊으시고는 어쩐지 허둥지둥 저쪽으로 사라지셨습니다. 언뜻 뒷모습의 귀 끝이 빨개져 있어서 저는 내심 웃고 말았지요. 참으로 알기 쉬우신 분이라니까요?

   그런 생각을 하며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부군과 마찬가지로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영주님이―그래도 행동만큼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침착하게 저를 맞아주셨어요. 손에는 아직 뜯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편지 봉투가 들려 있었지요. 레하트 님은 그 봉투를 소중히 서랍 속에 넣으시더니 저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왔니?"

   "네에. 바쁘신 와중에 온 걸까요?"

   "아니야, 카라샤. 일단 저번에 내준 숙제부터 확인을 할까?"

 

   그리고는 무언가―이를테면 타낫세 님에 대한 짓궂은 물음 같은 것을―더 물어볼 새도 없이 집무실에 딸린 곁방으로 이동하여 수업을 진행하였지요. 먼젓번의 숙제부터 확인을 한 뒤엔 간단한 문법서를 앞에 두고, 저는 끙끙대며 글을 옮겨 쓰고, 레하트 님은 흰 종이를 앞에 둔 채 무언가 고심하시는 낯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고 계셨지요. 흘긋 눈치를 보며 종이를 살피니 다행히도 제가 읽을 수 있는 글자입니다. 편지라도 쓰시는 모양인지, 어쩐지 아주 익숙한 분의 이름이 쓰여 있었지요. (…그렇지만, 같은 저택에 사시는 분이라면 굳이 글로 이야기를 전할 필요가 있을까요? 얼굴을 마주보고서 이야기하면 될 텐데.)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저어, 피아칸트는 아주 별세계라지요?" 침묵을 깨기 위한 저의 물음에 레하트 님은 상냥히 고개를 끄덕이셨지요. "응. 볼거리도 많고, 왕성은 어찌나 큰지… 그만한 석조 건물은 어디에서도 보기 힘들 거야. 아아, 이 근처에는 신전이 있으니 또 모르겠구나."

   "저는 아네키우스 님의 축일 빼고는 디톤에 가본 적이 없어요. 그때도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안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한 걸요." "그렇구나. 아쉽네." 다독이듯 말씀하신 레하트 님이 덧붙이셨습니다. "…그러면 내가 나중에 디톤에 대해 쓰인 책을 빌려줄게. 책으로 읽으면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뭐든지 알 수 있어. 글을 알면 세상이 넓어진단다." "정말요?" 저는 무척 기뻐서 손뼉을 쳤습니다. 뒤이어 레하트 님이 "다음번 피아칸트 방문에는 널 데리고 가야겠네" 하고 지나가듯 말씀하셔서, 저는 왕성 생각에 홀딱 빠져 제가 글씨를 쓰는지 글씨가 저를 쓰는지 모른 채, 레하트 님이 그래서 타낫세 님께 무어라 적으려고 하신 건지 엿보는 것도 잊은 채 남은 시간을 보냈답니다.

 

   

   짧다면 짧은 한 시간 동안의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저는 식당으로 도로 내려가야 했지요. 레하트 님 덕분에 식사 준비에서는 빠질 수 있었으나 그래도 급사는 제 담당이었기 때문이에요. 식당에 도착해보니, 이미 작은 수레에 음식들이 실려있어 응접실로 옮겨가기만 하면 되었지요. 이 저택에도 연회장이 있기는 하지만 단 두 분이 쓰시기엔 지나치게 크고 번잡하단 이유로 주로 응접실에서 식사를 하시고, 곁에도 적은 수의 시종만을 두십니다. 저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손이 야무지고 일 처리가 똑바르단 이야기를 들어서, 어지간히 연차가 높지 않으면 할 수 없다는 급사까지 맡은 것이지요.

   하여간, 응접실에 도착한 후 몸을 빠릿빠릿하게 움직여 식사 준비를 하고 있노라니 타낫세 님과 팔짱을 낀 레하트 님이 안으로 들어오셨어요. 레하트 님은 저와 눈이 마주치자 부드럽게 웃어주셨지요.

 

   "오늘도 고생이 많구나."

 

   다정히 제 어깨를 두드리시곤 자리에 앉으시는데 어쩐지 저는 뒤통수가 따가웠습니다. 의아한 마음으로 뒤를 돌아보니 타낫세 님께서 조금 기분이 나쁜 듯한 낯을 하신 채 이쪽을 쳐다보고 계셨지요. 저는 이유를 알 수 없어 주변을 돌아보았습니다. 제 눈에는 식사를 담은 트레이가 들어왔지요. 아아, 혹시 오늘 메뉴가 마음에 안 드시는 탓일까요? 오늘은 인근 맑은 개울에서 잡히는 가재를 매콤하게 조려낸 것을 주요리로 내었는데--이 근방에서는 별미로 유명한 음식이랍니다. 레하트 님이 입에 맞으시는지 종종 찾으시는 음식이기도 했지요. 저는 이를 어쩐담, 하는 마음으로 타낫세 님의 눈치를 슬금 살피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타낫세 님은 특별히 가리시는 음식이 없었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눈치를 보느라 더욱 그러했지요. 하지만 타낫세 님은 별다른 말 없이 레하트 님 맞은편으로 가 앉으셨어요.

 

   "…음식이 식겠어. 어서 식사를 시작하지."

   "응."

 

   레하트 님이 여상히 고개를 끄덕이시는 것을 신호로 급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부드러운 수프를 곁들인 전채부터 시작하여 여러 음식들이 착착 날라져 갑니다.

 

   "너무 적게 먹고 있는 게 아닌가? 조금 더 먹어도 좋을 텐데… 오후에도 바쁘지 않나."

 

   자못 걱정스러운 듯한 목소리가 레하트 님께 이야기합니다.

 

   "나 벌써 두 접시나 먹었는걸."

 

   그러면 레하트 님은 도로 물으시지요.

 

   "그러는 타낫세야말로 그것만 먹고 되겠어?"

   "나는 됐어. 네가 먹고 있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니까."

 

   이런 식의 대화가 두어 번쯤 더 오갑니다. 아, 저는 "아이고, 좋을 때다―" 그런 생각을 하며 테이블 옆에서 가재를 손질하고 있었지요. 가재는 딱딱한 껍질 안에 맛있는 살이 숨겨져 있는 것은 좋으나, 여간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 아니라서 이렇듯 요령 있는 사람이 손질을 하지 않으면 제대로 먹기가 힘들답니다. 제가 가재와 씨름을 하는 동안 두 분은 서로에게 빵 한 조각이라도 더 먹이기 위해 애정 어린 싸움을 하고 계셨지요. 한쪽의 승기가 보이지 않는 두 분과는 달리 곧 가재와의 씨름에서 이긴 저는, 발라낸 가재 살을 매콤한 양념과 함께 덜어 두 분의 접시 위에 올려드렸습니다.

 

   레하트 님은 음식을 맛보시곤, 만족스러우신지 즐거운 낯을 하셨지요. 오가는 포크와 나이프 소리로 듣건대 타낫세 님 역시 입에 맞지 않는 건 아니신 듯하여, 저는 요리사에게 전해주면 좋아하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트레이를 끌고 응접실을 나서려 했지요.

 

   "자, 아― 해봐. 타낫세."

   

   그리고는 레하트 님이 그대로 포크를 타낫세 님 앞으로 다정히 내미는 광경 같은 것은 목격하지 않는 게 두 분께 좋았겠지만 말예요.

 

   "이, 이런 건 둘만 있을 때만 하기로 하지 않았나……."

 

   타낫세 님은 다소 부끄러운 어조로 웅얼거리시다, 레하트 님의 간청에 못 이긴 양 음식을 받아 드셨어요. 우물우물 씹으면서도 괜히 이쪽을 흘깃 노려보시는 시선이 느껴져, 저는 웃음을 꾹 참아야 했지요.

 

   "뭐 어때. 카라샤는 어디 가서 이야기하고 다닐 사람도 아니고 말야. 그렇지?"

   "아이 참, 네. 네. 물론이구 말구요."

 

   갑자기 대화에 불려 나온 저는 고개를 끄덕이곤, 작은 수레 위에 실린 식기들을 살펴보는 척 달그락거리며 얼른 이곳에서 빠져나가고 싶단 의사를 표현했지요. 참으로 사랑스러운 광경이지마는 조금 더 남아있다가는 묘하게 원망스러운 낯을 하신 타낫세 님께 무슨 소리를 듣게 될 지 모르니까요. 제가 좌불안석하는 와중에도 레하트 님은 그저 해사하게 편 얼굴로 타낫세 님께 "봐, 그렇다잖아." 하곤 다시금 포크로 가재 살을 집어 그분께 내미셨습니다. 타낫세 님은 결국 그날 나온 가재 요리의 양념만큼 얼굴이 붉어지셔선… …하여간 저는 귀여우신 두 분의 모습에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급사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식사 시간이 지나자 오후에는 잠깐 시간이 나서, 오전에 레하트 님이 빌려주신 문장법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지요. 그 중, 한 가지 문장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적힌 예문은 그러했습니다.

 

            tecum vivere amem, tecum obeam libens*

 

   좋은 문장이었어요. 그러나 저는 문장이 품은 뜻에는 시큰둥했고, 그보다는 문장에서 쓰인 접속법의 용법이 아리송하여 머릿속에서 쉽게 떨쳐낼 수가 없었지요. 혼자서 끙끙거리며 고민해보았지만 답이 나오지는 않았어요. 거기다 주변에는 물어볼 사람이 마땅치 않고, 마침 레하트 님께 차를 가져다드리는 시간이기도 했기에 겸사겸사 질문도 하고자 책을 챙겼지요.

 

   이 시간에는 항상 집무실에 계시기에 자연스레 식당에 들러 다기茶器와 찻잎, 주전부리를 챙겨서 가는 도중에도 제 머릿속에는 문장법 책에 대한 생각뿐이었지요. 그러나 도착해보니, 레하트 님은 잠시 자리를 비우신 모양인지 집무실은 비어 있었어요. 저는 곧 돌아오시겠거니 싶어 레하트 님의 책상으로 가 챙겨온 다기를 내려놓고 질문할 거리를 곰곰이 되새기고 있었지요.

 

   그래서, 아마도 그래서였을 거예요. 그러고도 한참을 돌아오시지 않아 심심함을 이기지 못한 제가 시종으로서의 책임감이 발동하여, 한창 보고서를 살펴보시던 중에 나가신 모양인지 어지럽혀진 책상 위를 보고 조금 깔끔하게 정리만 해놓아야지, 하고 생각하고 만 탓에, 그래서 레하트 님이 아침에 소중히 만지작거리시던 편지 봉투와 한 쌍으로 보이는 고급스러운 편지지가 책상 한쪽에 고이 펼쳐져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만 것은요.

   그리고 그에 걸맞게 우아하고 단정한 필기체로 길게 적힌 편지에서, 유난히 한 문장만이 제 시선을 사로잡은 이유도, 제가 하필 그 문장을 직전까지 문장법 책에서―저는 나중에야 알았습니다만, 문장법 책은 주로 고전의 문장을 예문으로 인용해놓기에―골몰하여 본 탓이겠지요.

 

         너와 함께 살고, 너와 함께 기쁘게 죽으리라.

 

   그러한 편지의 가장 아래에 쓰인 것은, 레하트 님과 더불어 제게 아주 익숙한 사람의 이름이라는 점도 말이에요.

 

 

 


*Latin. Ho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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