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모카테 로니카/레하트(여분화)
로니카 애정B 엔딩 이후
개인 설정이 있는 왕 레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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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ght in White Satin - Percy Faith
youtu.be/G5gAf-7FNVE
시종은, 침실 어귀 타인의 기척을 느끼고 잠에서 깼다. 그것은 오랜 본능이었다. 노구老軀라 할지라도 일생의 훈련이 몸 깊숙이 배인 터였으므로. 아니, 답지 않게 열이 나 깊은 수마에 빠져있던 탓에 오히려 평소에 비하면 아주 늦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 기척이 자신의 방에 들어올 때까지 모르고 있던 셈이니. 외상 아닌 사유로 와병을 하게 된 것은 분화를 거친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육체나, 마찬가지로 열감에 흐려진 감각 같은 것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문간에 서 있는 건 아주 익숙한 인영이다.
한 해가 끝나가며 가맣게 물든 달에 사위가 어둑하지만, 어둠에 익숙한 눈은 어렵지 않게 한 사람의 윤곽을 그려낸다. 작은 등잔을 든 그는 자신이 잠에서 깬 것을 알고도 문간에 서서 이쪽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라, 늙은 시종 역시 그쪽을 보고만 있었다. 희미한 등잔불이 꺼질 듯 어룽어룽한다.
"레하트 님."
기름칠 되지 않은 톱니처럼 잠긴 소리가 난다. 목을 가다듬고 다음 말을 내뱉는다.
"늦은 시간입니다. 제대로 주무셔야 내일의 정무에…."
"되었어. 그대야말로 그대로 잠든 체 하지 그래. 짐을 무안하게 할 생각이 아니라면."
왕은 가볍게 혀를 차더니 천천히 걸어 침상 곁으로 다가왔다. 얇은 침의가 소리 나지 않고 끌려왔다. 잠을 자던 중에 나온 것인지, 혹은 잠들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인지, 둘 중 어느 것이든 늦은 시간이었기에 늙은 시종은 오랜 버릇처럼 걱정을 하고 만다. 적당히 의자를 끌어다 앉은 그는 등잔을 내려놓은 뒤 여상한 손길로 양초에 불을 붙였다. 시종은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그가 만류하여 그대로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레하트가 물었다.
"그래서, 몸은 좀 어떤가."
"괜찮습니다. 그저 이렇게 앓아본 것이 오랜만인지라…."
약물의 기운이 남았는지 입안이 썼다. 그 말대로였다. 아주 어려서부터 육체의 건강에는 자신이 있는 사람이었다. 일생을 도구로써 살아온 자로서, 제 기량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 중이라 확언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비는 땅에 부딪히고, 강은 바다로 흘러드는 것처럼―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영원한 것은 없다. 건강하던 육신도 노쇠하고 병들고 미끄러지는, 그저 그런 것뿐인 일이다. 하지만 '그런 것'임에도 회한이 섞여들고 마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리라.
시종은 때때로 이 노구의 쓰임이 어느 시점까지 기능할지 가늠해보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바로 눈앞의 얼굴이었다.
꼭, 어느 해의 마지막 날 이후부터였다. 늙은 시종은 때때로 그날을 반추했다. 덜 여물어 가느다랗던 목선. 억세게 틀어쥔 손아귀에서 생동하는 맥. 할 수 있으면, 하면 된다. 맹랑하게 소리쳤던 아이는 그가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그런 질문을 하였던가. 그는 사람이되 도구였다. 언제라도 명을 받기만 한다면, 적절한 순간이라 확신한다면, 주저 없이 목을 조를 터였다. 아무리 친애하고 친근히 여기는 이라 할 지라도.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어린아이라 할 지라도.
그리고 도구이되, 사람이었다.
그 결과로써 젊은 왕의 곁에 남은―늙은 육체가 지금 침대에 깊숙이 잠겨 있다.
"…짐이 그대를 혹사시키는 중이라는 건 잘 알고 있으니, 이참에 푹 쉬어두도록 해. 완전히 낫기 전까진 복귀할 생각은 꿈에도 말고."
낮에는 왕성 어의가 그를 진찰하러 와서, 옮는 종류의 병은 아니지만 나이가 있으니 당분간 요양할 것을 추천했다. 거기에 다른 사용인들로부터 극진한 간호까지 받았다. 누구의 명령인지는 뻔했다. 애초에 본인이 모든 정무를 내팽개치고 곁에 붙어있을 수 있다면 직접 그렇게 했겠지. 그러고도 남을, 다정하지 않아도 될 것에게까지 다정한 사람이 자신의 주인이었다.
"제 건강 같은 것으로 레하트 님께 걱정을 끼치다니… 송구합니다. 저도 정말로 산에서 마중을 올 때가 된 모양이지요."
"그런 말은 말아. 답지 않게 약은 소리를 하는구나."
그는 농담이라 생각했는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띄웠지만, 내쉬는 한숨에 금세 허물어졌다. 방 안의 공기는 조용히 가라앉았다. 둘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좁은 대기실 안은 촛불이 밤을 살라먹는 소리까지 들려올 정도로 고요해졌다. 로니카는 무거운 눈꺼풀을 깜박였다.
그때 레하트가 머뭇대며 손을 뻗어왔다. 이마에 손끝이 닿자,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갈 곳 잃은 손은 잠시 주위를 방황하다 시트 끄트머리에 내려앉았다. 시종은 숨을 내쉬었다. 긴 시간 겹겹이 퇴적된 거절이 오랜 흉처럼 그의 적갈색 눈동자에 남아있었다. 그는 평범한 어투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원하지 않는 일은 하지 않아."
"…송구합니다."
"그러니 사죄할 필요도 없어."
이내 거둔 손을 무릎 위로 그러모으고는, 시선을 내리깐다. 긴 속눈썹 아래로 드리워진 그림자에 눈동자가 감추어진다. 새삼 그는 분화 이전과 생김새가 많이 달라졌다. 허리까지 굽이치는 머리카락이나, 이제는 시종이 올려다보아야 할 정도의 키, 부드럽고 유려한 곡선, 정갈한 이목구비, 정무에 시달리며 눈가에 켜켜이 쌓인 피로. 같은 것은 이마의 인印 뿐인가, 싶을 정도로.
언젠가 꿈속에서 이 모습을 보았던 것도 같다. 신열로 들뜬 머릿속에서 그렇게 말한다. 꿈, 꿈이라. 흐릿하고 고달픈 혈관 속에 흐르는 것은 과거의 한때다. 그때는 자신이 아니라 그가 침상에 누워 있었고, 지금보다 어린 모습이었고, 똑같이 열이 올라 자리보전 중이었다. 이 넓은 왕성 안에서 그를 보러 와줄 이가 고작 이런 시종 뿐이라는 사실에 안타까워도 했던 것 같다.
뒤이어 떠오른 것은 처음 맞이하러 갔을 적의 그였다. 수수한 차림 너머 신의 표식만이 유일한 장신구처럼 영롱히 빛을 내고 있었던 모습. 왕성에 가고 싶지 않다 말하던 그 모습. 록차 한 구석에서 주먹을 움켜쥔 채 바짝 굳어있던. 그러나 그 소년은 이제 왕이 되어 있다. 그의 주인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사랑한다 말하고. 그리고.
로니카는 띄엄띄엄 내뱉었다.
"레하트 님과는… 제가 이전에 모신 주인들에 비하면, 참으로 짧은 시간이었지요."
"……."
지금은 젊은 왕의 시대였다. 하루의 대부분을 옥좌 위에서 보낸다고 하나, 그는 한창 싱그럽게 영글 나이의 청년이었다. 한창 아름답고 빛날 시기를 이런 노인에게 매여 지낼 이유가 하등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때때로 노인은 그와 함께 하는 어떤 미래를 가정해보았으나 결국 의미가 없는 행위였다. 로니카는 그를 새로운 주인으로 섬기기로 결정할지언정, 레하트가 바라마지 않는 그 방식으로는 응답할 수 없는 인간이었으므로. 자신이 돌려줄 수 있는 건 아주 적었다. 그렇기에 그에게 약속했었다.
"그러나 순리는, 순리입니다. 비록 레하트 님의 치세를, 끝까지 보지 못하고 가게 된다면… 아쉬울 것 같습니다만…."
"……."
왕은 어떤 불유쾌한 생각이 심중에 들어찼는지 아예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려버렸다. 시종은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말했다.
"간혹, 생각이 듭니다. 아니, 이제는 확신합니다."
"로니카 벨 하라드."
드물게도 초조하기까지 한 목소리가, 엄히 시종을 호명했다. 이제는 그만하라는 뜻이다. 하지만 열로 혼곤한 정신에는 그런 것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눈을 감아버렸다. 내뱉어버렸다.
"이대로는, 그때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지도 모르겠다고…."
늙은 시종은 딱 한 순간, 그저 어떠한 순간까지만 자신이 살아있기를 바랐다.
그의 충의를, 연심을, 이것이 충정이라 말하는 불충不忠을, 그럼에도 이 마음을 버리지 못하는 괴로움을 주인이 알게 되는 날까지만. 도구 된 자로서 주인에게 마지막으로 사용될 그날까지만. 그에게 죽음이 필요하게 될 그날까지만. 만일 그때가 도래한다면 그 순간을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게 되기를 바랐다. 그 순간을 감히 소유하기를 원했다.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그날까지만 자신이 살아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신의 부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자신은 천천히 산으로 가라앉아간다. 높은 곳에 앉은 그와는 다르게.
"죄송합니다, 레하트 님."
"……."
"폐하의 심기를 거슬렀다면, 언제라도 좋으니 해임을 시켜주십시오."
쿨럭거리며 기침을 몇 번 내뱉었다. 눈을 감고 있으니 세상은 그저 어두웠다. 사지가 무엇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자신을 내리누르는 열과, 통증과, 잠에 굴종하고 싶어졌다. 양초 타는 냄새가 둔중하게 감돌았다. 레하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끓어오른 감정을 가까스로 감추어 정돈되지 않은 기미는 있었으나 그럼에도 훌륭히, 선언하듯 또렷한 목소리였다.
"아까 말한 것처럼 나는… 짐은, 그대가 원하지 않는 일은 행하지 않아. 언제까지나."
"…예."
"그러니, 안심해라. 그대가 아닌 다른 이에게 '그것'을 넘겨줄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
"……."
"짐은 그대의 마지막 왕으로 죽는다. 그대는 그렇게 충성의 보답을 받는다."
마지막 것은 거의 속삭이다시피 했다. 시종은 그에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곧 의자를 끄는 소리가 났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선 듯싶었다. 하지만, 멀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이는 거꾸로 고개를 숙여 몸을 가까이 하였다. 시트 위 시종의 손이 놓인 자리였다. 그는 노쇠하여 주름이 지고 갖은 흉터가 남은 손등 위로 제 볼을 가져다 대었다. 맞닿은 노인의 피부와는 달리 희고 매끄러우며 미지근한 온기를 품은 것을. 돌아오지 않는 시간을.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로니카, 그것이 당신에 대한 나의……."
열기로 바짝 마른 살갗 위를 적시는 것은 어렴풋한 물기였다.
"……니까."
그 말만이 수마로 흐려지는 정신 속에서 유일하게 뚜렷했다.
해짐작(-斟酌)
하루해가 얼마나 남았는지 하는 것을 해를 보고 짐작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