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09
커미션//데릭히카

 

*공백 포함 4,558자

*FF14 데릭/모험가


 

 

     조용하군.

     데릭이 '일곱째 낙원'의 출입문을 열두 번째 쳐다보다 저도 모르게 그런 감상을 주워섬긴 것은, 이젠 종소리가 울릴 일 없는 망자의 종소리의 어느 평온한 오후였다. 모르도나는 어느 대도시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활기로 가득 찬 곳은 아니어도 모험가나 학자를 비롯하여 방문객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는 곳이다. 특히 새벽의 거점―이제는 타타루라는 아가씨의 개인 상점으로 바뀌었다는 소식은 들었다만―과 이어진 일곱째 낙원은 모험가나 모르도나를 경유하여 커르다스로 향하는 상인들, 은빛눈물 호수를 찾아온 관광객, 성 코이나크 재단의 연구원들로 자리가 비는 날이 없는 주점이므로 조용하다는 말은 적합하지 않다.

     아마 하루 중 가장 한갓진 시간일 지금도, 일행들끼리 즐겁게 떠드는 목소리와 그 사이를 은은하게 흐르는 하프 선율 덕에 고요와는 거리가 먼 상태다. 데릭은 저도 모르게 카운터 위를 손끝으로 두드리고 있다가, 자신의 행동을 눈치채고 손가락을 그러모았다. 그렇다면 이 감상은 다른 이유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이를테면 늘상 이 시간 즈음이면 자신을 찾아와 조잘대던 녀석이 없어서라든지.

 

     데릭은 원래 떠도는 일을 즐겼다. 제 영혼은 한 곳에 고이기보다는 산과 들판과 협곡을 바람처럼 떠돌았고, 제 발길은 영혼의 부름을 충실히 따랐다. 여행과 그에 따르는 고독은 제 영혼의 천성이나 다름없었다. 휴식을 취할 때에도 사람들이 모이는 주점이나 식당에서 시간을 죽이기보다는 조금의 보존식과 음료를 들고 자연 속에서 홀로 쉬는 것을 선호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던가, 이 시간 즈음엔 늘상―마치 누군가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비슷한 장소를 찾아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사실 그 계기가 불확실한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바로 파이퍼 헤이든 때문이다.

 

     다음번 조사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건만 파이퍼 헤이든은 이틀에 한 번 꼴로 자신을 찾아왔다. 처음에는 근처를 지난다거나 하는 식의 우연이 몇 번 겹친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우연이라 치부하기 곤란한 수준에 이르자 그 이후로는 그녀의 멈출 줄 모르는 호기심과 친화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곤란하기는 해도 그녀는 놀랍도록 사람들 사이에 잘 스며드는 사람이었다. 반대로 데릭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썩 좋은 말벗이 아니었고, 유쾌한 동행도 아니었으니 그녀의 그런 성격이 제게도 뻗쳤을 뿐이라고 여겼다. 만나서 하는 것이라곤 별것 아닌 담소―대부분은 파이퍼의 재잘거림으로 채워졌다―뿐이기도 했고. 아마 그랬을 것이다.

 

"데릭, 데릭은 못 먹는 거 있어―?"

"글쎄... 딱히 없는 것 같은데."

"그러면 이거 같이 먹을래?"

 

     파이퍼는 자신을 만나러 올 적이면 꼭 간식거리를 들고 오곤 했다. 이유 없는 만남에 이유를 붙이기 위함이었는지, 그냥 그녀 자신이 디저트를 좋아하는 탓인지는 몰라도. 그건 유명하다는 베이커리나 디저트 가게에서 사 온 것이거나 그녀가 선물로 받은 것일 때도 있었고, 가끔은 직접 만든 것일 때도 있었다.

 

     당근 푸딩. 황금색 벌꿀을 뿌린 크루아상. 레몬이 들어간 와플. 롤란베리 치즈 케이크. 레몬 커드 자허토르테. 모르스. 파이퍼가 어떤 식으로든 더 노골적으로 굴었더라면 먹을 것으로 자신을 길들이거나 살찌우기라도 할 요량인지 의심했을 테다. 그중에는 대체 어디서 구해온 것인가 싶은 신기한 디저트도 몇 있었다. 안 그래도 가장 마지막으로 그녀를 만났던 일주일 전에는, 귀한 용과가 들어간 디저트를 가져온 그녀에게 질문했다. 에오르제아 전역의 디저트 가게를 꿰고 있기라도 하냐고.

 

"나도 그렇지는 않아! 근데 여기는 라하가, 전에 내가 좋아할 것 같다고 같이 가자고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같이 못 갔거든."

 

     파이퍼는 에오르제아의 영웅이라는 칭호를 들었을 때 사람들이 선입견에 의해 으레 상상할 법한 외형과는 다소 거리감이 있는, 앳되고 소녀 같은 인상이었다. 새까만 머리칼과 대비되듯 희게 질린 얼굴 위로 어린 희미한 홍조나 특유의 발랄한 행동 덕에 더욱 앳되어 보이는 경향이 있었다. 그녀는 꿀에 절인 용과 위에 레몬을 짜면서 가볍게 콧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며칠 전에 시간이 생겨서 혼자 다녀왔거든! 근데 아주 맛있어서 데릭도 먹어보라고 사 왔어."

 

     파이퍼는 스스럼 없이 개인명으로 그라하를 칭하면서도 그녀 자신이 하는 행위, 분명 그가 데이트 권유를 겸하여 이야기를 꺼냈을 게 분명해 보이는 장소를 혼자 다녀왔고, 거기서 구매한 디저트를 그가 아닌 자신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특별한 자각이 없는 듯 보였다. 파이퍼에 의하면 그라하가 아주 바쁜 탓이라지만―그가 요즘 꽤 바쁘다는 이야기 역시 파이퍼를 통해 전해 들은 것이다―평소 그 빨간 머리의 현인이 파이퍼에게 보여주는 '헌신적인' 모습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흐르는 감정이나 관계도 같은 것에 어두운 데릭도 눈치챌 정도로 선명한 무언가가 배어 있었기에 그날은 지나가듯 그 녀석이 불쌍하다, 생각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녀석은 그 녀석이고 지금은 자신이 문제였다. 그래, 그렇게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이틀에 한 번꼴로 찾아와 달콤한 디저트를 먹이며 재잘대던 그녀가 일주일째 뵈지를 않는다. 물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이지 실제로 약속을 한 건 아니었기에 갑자기 그녀의 방문이 끊겼대도 할 말이 없는 처지이기는 했다.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버릇처럼 모르도나를 찾아 주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기도 했고, 어차피 산 좋고 물 좋고 발 닿는 곳으로 떠나는 것이 취미이자 일상인 제가 남는 시간을 주점에서 맥주 한 잔, 미코테식 해물 산적 한 접시 시켜놓고 허송세월한다 해도 아무 상관 없지만.

 

     …근데 그럼 다음에 보자는 말은 꺼내지 않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언제나 약속 없이 찾아왔던 파이퍼는 그날의 담소가 끝나 떠날 적이면 늘 같은 인사를 남겼다. "그럼 다음에 또 봐." 물론 이다음이 제대로 정해진 적은 한 번도 없었으나, 그녀는 늘 그 말대로 했다. 꼬박꼬박 한 손에는 달콤한 디저트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이야깃거리를 들고 자신을 찾아왔다. 늦은 오후를 채우는 그녀의 재잘대는 목소리나 설탕과 밀가루, 과일, 그 외의 수많은 것에 익숙해지고도 남을 만큼 자주. 그리고 데릭은 그것이 곤란했다. 또 초조해졌다.

     다음은 대체 어느 정도의 시간을 말하는 것일까? 경험적으로는 그것이 이틀에서 사흘 사이의 간격을 가졌다고 하나, 이번처럼 길어진 적은 한 번도 없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면 그저 할 일이 생겼거나 방문을 까먹었다거나 그녀의 관심을 잡아끄는 더 흥미로운 사건이 생겨서 그런 것이겠거니… 싶지만.

 

     파이퍼는 시답잖은 소리도 즐겁게 늘어놓을 수 있는 재주가 있었고, 종잡을 수 없는 농담으로 데릭마저 몇 번 미소 짓게 만들었고, 자신처럼 재미없는 사람과 하는 대화가 무엇이 그리 재미있다고 자주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 본인은 모르는 것 같았지만―파이퍼 헤이든이라는 사람은 대단한 침투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사람과 눈을 자주 마주치지 않는 제가 파이퍼의 눈동자 색을 기억할 정도로, 파이퍼와 함께 있으면 제 모든 주의력이 그녀에게 돌아가곤 했으니까.

 

 

     가게 문이 딸랑, 열리는 소리에 시선이 반사적으로 그리 향했다. 탐사를 마치고 돌아온 모험가 너덧 명이었다. 당연하지만 파이퍼는 없다. …곤란했다, 정말로.

 

 

     그제야 둔감하디 둔감한 남자는 자신이 길들여진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에게는 그런 의도가 없었을지라도, 지금 저 문을 열고 나타나는 이가 파이퍼였으면 좋겠다―그런 생각을 떠올린 순간 확실해진 사실이었다.

     자신은 언제나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지내는 것이 익숙했고, 그러고 있노라면 편했다. 교류는 불편했고 친목은 비효율적이라 생각했다. 가까워지지 않으면 상대에 대해 알 필요가 없다. 상대에 대해 알아가는 것에는 기력이 필요하다. 그러니 알아가지 않겠다 다짐하면 구태여 힘을 쏟을 필요도 없다. 그저 그런 사람들 사이를 물 흐르듯, 바람 불듯 그렇게 홀로 떠돌고 흘러 다니면 되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새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즐거움에 대해 알게 되었다. 매일 같이 찾아와 제게 관심을 비추던 그녀를, 그런 비효율의 과정을 감수하며 저를 '길들인' 그녀를 기다리게 되었다. 명랑한 목소리로 저 문에서 뛰어 들어와 "데릭!"이라며 반가움이 담긴 목소리로 제게 인사하고, 그녀의 양손에 들린 것을 보고는 다른 누구보다 저를 먼저 떠올렸다는 사실에 내심 기뻐하고, 자신은 오늘은 무얼 맛보게 해줄지 궁금한 상태로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를 건네던 것이 그리웠다. 재잘대는 목소리가 없는 오후는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그래서 일주일 내리 그녀를 기다렸다. 그녀가, 보고 싶었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어.

 

     깨달음의 순간엔 종이 울리지도 꽃잎이 날리지도 않았다. 다만 건조하고 담백하며, 또 익숙하지 않아 당혹스러운 감각이 물결처럼 자신에게 밀려왔다. 그러나 차갑지는 않은 물결이었다. 햇살처럼 따스하고 부드럽게 스며드는 그런 종류였다.

 

"아……."

 

     데릭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였다. 사춘기 소년이라도 된 것처럼 심장이 본래의 박자와 엇갈려 쿵쾅 소리를 내며 뛰었다. 이 역시 당혹스러웠다. 우습지만 그러했다.

 

 

     그리고 그때 또다시, 주점 문에 매달린 종이 딸랑 울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자신이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이기를 바라며 또다시 문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을 때에는―

     데릭의 입가에는 어느새 저도 모르게 자그마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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