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10
라라 1200일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연인들의 평범한 데이트, 그런 밤이었다. 림사 로민사의 레스토랑 '비스마르크'는 위치부터가 바다 위에 세워진 하얀 산호탑의 도시, 푸른 바다와 흰 건물이 늘어선, 그야말로 절경에, 산지와 접한 덕에 늘상 싱싱한 해산물이 공수되어왔고, 무엇보다도 요리가 아주 맛있는 편이었기에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늘 인기가 많았다. 날 좋은 밤 저녁 식사를 하려면 아예 며칠 전부터 예약을 잡아야 할 정도이니 말은 다 했지만.

     엘라헤와 라티카르는 여느 연인들처럼 그런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데이트를 즐기는 이들의 삶이 언제나 생과 사의 극단을 오가며 목숨을 걸고 최전선에서 나서서 싸우는, 다시 말해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말하자면 그들의 인생에서 드물고 부족한 것이야말로 평범함이었으니 그야말로 평범하지 않은 데이트였지만, 그저 스쳐지나는 이들이 그러한 점을 눈치채기란 심히 어려울 것이었다.

 

 

"오늘 맛있었어. 다음에 또 오고 싶다…."

"그럴까요? 음, 라티가 외식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는데."

"그, 그야 물론 엘이 해주는 것도 다 맛있지만…!"

"농담이에요. 농담."

 

 

     특별한 기념일을 맞이하여 상당한 거금을 주고 예약한 레스토랑이었다. 한 손가락에 백 일씩 헤아려도 양 손이 모자를, 천 일 하고도 이백 일. 언약식을 올리고 함께 생활을 이어나가며, 조금은 무뎌졌을지 모르나 어느새 그만큼 소중하게 쌓아 올린 시간이었다. 또한 엘라헤는 그런 면에 있어서는 특히 세심한 남자였고, 그렇기에 그들이 얼마나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든, 역시 기념일에는 좋은 식사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는 아주 당연한 귀결.

 

     대부분의 모험가들처럼 딱히 지갑 사정이 여유롭지 않은 그들은 여느 부부들처럼 집에서 주로 식사를 해결하는 편이었다. 거기에 다행이라고 해도 좋은 것인지, 엘라헤는 본인의 요리 솜씨에 자부심이 있고 언제나 제 연인을 잘 먹이고 싶어 하는 편이었기에 대충 해서 먹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외식이 주는 기분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어쨌거나 지금은 거한 코스 요리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후식을 맛보는 중이었다. 가벼운 샴페인을 곁들인 채 미온하고 짠내 나는 바닷바람과, 사람들의 웅웅대는 소음, 저 멀리서 밀려드는 파도 소리를 즐기고 있노라니 노곤하고 만족스럽기 짝이 없었다. 엘라헤는 손을 뻗어 제 몫의 디저트를 라티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라티카르는 당연하게 접시를 받아 들었다. 조그마한 바질이 올라간 치즈 타르트가 포크의 모양대로 부드럽게 으스러졌다.

 

     천 이백 일이라는 시간은, 두 명의 사람이 서로에게 익숙해지고도 남을, 서로가 꼭 아물리는 퍼즐 조각처럼 변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이를테면, 잘 먹는 연인의 얼굴이 얼마나 귀여운지…, 그것만 봐도 배부르니 큰일이었다. 엘라헤는 잔을 이리저리 빙글, 빙글 돌리다가 내려두고 제 맞은 편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귀와 꼬리가 바람결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이, 그 역시 적잖이 기분이 좋은 듯 했다. 손을 뻗어 어루만지고 싶은 것을 참았다.

 

     엘라헤는 짧은 평생 본인이 운 좋은 삶을 살아왔다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제 연인을 바라볼 적이면 그 모든 사소한 불행이 상쇄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일찍이 피붙이를 잃은 자신에게 가족이란 의미가 컸다. 스스로는 잘 드러내지 않았다 생각했지만 엘라헤는 늘 사랑에 목마른 상태였다. 단지 연인과의 사랑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사람과 사람 사이 주고 받는 그것에. 어렸을 때부터 풍족하고 충만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인지, 또는 어떤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몰랐으나, 일찍이 홀로서기를 시작하며 엘라헤는 혼자가 아닌 삶을 꿈꿔 왔었다. 자신이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과 단둘이 평생을 함께 하길 늘 꿈꿔 왔었다. 그리고 그러한 소망은 오늘로 천 이백 일째, 빼곡하고 빠짐없이 이루어진 참이었다. 엘라헤는 가볍게 웃었다.

 

 

"입에 맞았다면 다행이네요."

"응."

"옆에 앉을래요?"

"그래도 돼?"

"되지 않을까요. 사람도 별로 없고."

 

 

     디저트를 냠냠 해치운 그는 제 말에 다소 주저하는 눈치다가, 냉큼 제 옆으로 건너와서 앉았다. 그들의 자리는 식당 측의 배려로, 다소 구석진 곳에 위치하여 사람들과는 떨어져 잘 보이지 않는 자리였다. 집이었다면 무릎에 앉히고 그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채 이런저런… 하여간 그랬을 테지만, 일단은 2인용 소파에 나란히 붙어 앉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참지 못하고 일단 귀엽고 동그란 뒷통수에 입을 맞추기는 했지만.)

 

 

"엘, 손 줘."

"네에."

 

 

     얌전히 손을 내어주자 라티카르는 손가락을 얽듯이 하여 손깍지를 꼈다. 자신보다는 조금 작은 듯한 손이, 빈틈없이 얽혀왔다. 제 손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도 큰 편이었기에, 종족 차이까지 있는 제 연인의 손은 종종 소년의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라티카르가 엄지 손가락으로 손가락 마디 사이의 까칠까칠한 부분을 슬금 어루만졌다. 전장에 서는 치유사라기보다는 주부라고 하는 것이 어울릴 듯한, 습진을 달고 사는 손이 우스워 순간 웃음이 나왔다.

 

 

"이건 못 없애? 마법 같은 걸로?"

"연고는 바르고 있어요."

"내가 도와줄까?! 설거지라든가…."

"그것보단 정원에 물 주기라든가…."

 

 

     엘라헤는 일찍이 그가 부엌일을 도와주려다가 발생한 많고 적은 사고에 대해서는 이미 보고 깨달은 참이었기에, 조심스럽게 다른 일을 제안했다. 라티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저번 달부터 작게 텃밭을 꾸미고 이것저것 열심히 심기는 했지만 영 결과가 신통찮은 참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정원에 물을 줬던가? 하고 생각에 빠지려는 차에 그가 힘을 주어 제 손을 꼭 움켜쥐었다. 자신도 마주 꼭 잡은 채, 자연스럽게 그의 머리에 고개를 기대었다. 언젠가부터 익숙해진 그들의 의식 중 하나였다. 

 

 

"그러고 보니 머리가 많이 길었네. 신기하다…."

"꽤 오래 길렀죠? 어때요? 이상한가."

"응…?! 아니야…!"

"다행이다. 아니면 다시 자를까 했는데."

 

 

     엘라헤는 얌전하고 다정한 남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소위, 본인의 얼굴이나 목소리가 상대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아주 잘 아는 부류였고, 부끄럽게도 제 외모가 잘났다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으며, 마음먹으면 그것을 이용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언약식을 올린 이후로 그러한 마음은 주로 제 연인인 라티카르를 가볍게 놀리고자 할 때 발휘되곤 했지만. 엘라헤는 슬그머니 라티카르의 어깨에 턱을 기댔다. 동시에 팔을 감듯이 하여 옆에서 작은 몸을 폭 끌어안자, 처음엔 반사적으로 긴장하듯 굳었던 것이 풀어져 제 품에 기대어 오는 게 꽤나 마음에 찼다. 슬쩍 묶었던 머리를 풀며, 손을 뻗어 라티카르의 손등을 슬슬 어루만졌다. 숙인 고개에 긴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그의 손등 위로 흘러내려왔다.

 

 

"그래서, 고르자면 어느 쪽이 더 좋아요?"

"으음."

"내가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은 라티뿐이니까, 라티가 원하는 대로 할게요."

 

 

     부러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하며 부비듯 목덜미로 파고들었다. 라티카르의 고민이 길어졌다. 그 틈새를 노려 엘라헤는 제 욕망을 마음껏 채웠다. 단단하게 단련된 몸을 보듬으며 슬금슬금 어루만지자 라티카르의 꼬리가 무심결에 불만을 표하듯 소파를 두어 번 탁탁 쳤다. 그마저도 귀엽게 보였으니 할 말은 다 했지만. 엘라헤는 이러한 순간을 상당히 좋아했다. 누구라도 이렇게 제 연인이, 제 품에서, 사랑스러운 얼굴을 하고, 꼼질거리며 서로 체온을 나누는 상황을 마다할까 싶겠느냐마는, 엘라헤는 그의 연인과 이렇듯 체격차가 상당하여 늘상 제가 그를 끌어안을 적이면 품에 꽉 차게 안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의 체온을 가슴으로 온통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좋았다. 

 

 

"긴 머리는 만지기 좋아서 좋아."

"그래요?"

"일단은 이대로도 괜찮아."

"응, 일단은 이대로."

 

 

     엘라헤는 제 머리카락을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결이 얇은 머리칼이 둘의 손가락 사이에서 실타래처럼 감겨들었다. 곱슬기가 거의 없어 매끄러이 떨어지는 것을 멍하니 몇 번 만지작거리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이리 길게 기른 것도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길어진 머리만큼 길어진 시간이 그들 사이에 있었다. 뭇 사람들이 시간이란 모래와도 같아서 붙잡아두지 않으면 흘러가는 것도 모른다더니 틀린 말은 아니란 생각을 했다. 

 

 

"…앞으로도."

"응?"

 

     라티카르는 제 말에 슬쩍 몸을 빼더니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시선을 마주쳐왔다. 무슨 일이냐는 듯 눈썹을 치켜올리는 것에 괜히 장난기가 일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으니, 라티는 더욱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제 옷깃을 꾹 잡아당겼다. 모른척 시선을 피하며 눈을 깜빡이자 금빛 눈동자에 미묘하게 불만스러운 기운이 서리는 모습이 귀엽기 짝이 없다. 한참 의미없는 실랑이를 하다 결국은 먼저 백기를 들고 웃어버렸다.

 

 

"앞으로도 오랜 시간을 함께 하면 좋겠어요. 이런 모습도, 저런 모습도 보여주고 싶으니까."

"엘에 대해서 모르는 점이 없게 해주겠다는 거지? 그치만, 엘은 어떻게 해도 잘생겼는데…."

"정말이지. 칭찬이에요?"

"놀리지 마!"

"기뻐서 그런걸요. 내가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나를 잘 봐준다는데."

"그,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엘한테 항상 잘 보이고 싶은걸."

 

 

     우물쭈물 내뱉는 말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어, 엘라헤는 참지 못하고 다시금 웃고 말았다. 세상 무엇을 가져다 대어도 모자를 듯한 사랑스러움에, 깜찍한 연인을 그저 꼭 끌어안고 품 안에서 꼼지락대는 보송한 귀에 몇 번이고 입을 맞췄다. 간지러움에 절로 파득거리는 모습까지 귀엽고, 또 익숙하고, 그 익숙함 자체로 설탕처럼 단 것이라 엘라헤는 지금 이 순간이 계속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천 일, 이백 일, 그리고 앞으로도 헤아릴 수 없이 길게 나아갈 시간 동안까지. 제 삶에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보다 그가 존재했던 시간이 더욱 길어질 때까지. 그래, 아마도 삶의 끝까지. 

 

 

"…내 사랑."

 

 

     어둑함 속에서 일렁이는 조명과 별빛을 배경 삼아 고개를 들고 지그시 시선을 맞추었다. 어느새 사위로 내려앉은 밤 공기와 그에 실려오는 기분 좋은 내음, 정말이지 완벽한 데이트였다. 샴페인에 가볍게 달아오른 라티카르의 볼이 희미하게 붉어 손등을 대어보니, 작은 동물이나 되는 것처럼 자연스레 손바닥을 펼치더니 볼을 부볐다. 제가 그에게 익숙해진 것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도 제게 익숙해졌음이라.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익은 만큼--꼭 그만큼, 아직도 서로가 보여주지 않은 것과 알려주지 않은 것이 남아있음이라. 엘라헤는, 태양을 닮은 금빛의 눈동자 속에 제가 오롯이 비치는 광경이 퍽 마음에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러간다 할 지라도 결코 변하지 않았으면 했다.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자라고 자란 머리칼과, 모래알처럼 흐르는 세월 속에서. 

 

 

"앞으로도 당신의 시간을 전부 줄래요? 아깝지 않게 할게요."

"물론이지!"

 

 

     행복한 밤이었다.

 

 

 


옆테이블:웜마야~

죄송합니다. 또 앤오님한테 커미션 받은 사람... 

하지만,,,,,,,,,,,,,저에 마음만은 진심입니다.

라헤의 이 콩깍지는 92377년 동안 계속 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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