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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몇천 년이 지나더라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그것뿐인 이야기
약속이야
Fairytale, (buzzG) - DAZBEE Cover.
*공백 포함 6,110자
*FF14 휘틀로x아노
한 해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파네스는 실험일지의 공란을 메우며 새삼스레 시간의 흐름을 되새겼다. 당대 할마루트가 직접 교습을 진행하는 고급 식물론 수업이 오늘로 종강이었다. 마지막 수업인 탓에 교습실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느슨했고, 여기저기 작은 소리로 웅성웅성, 소란했다. 오늘은 학기 내내 진행한 과제를 마무리하여 보고서만 제출하면 되었기에 다들 제출용 이데아를 점검하거나 표본의 프레파라트를 정리하고 일지를 추리느라 번잡하다. 이번 과제는 할마루트가 직접 심사할 예정이었으므로, 졸업 이후 할마루트 원園에 들어가고자 하는 이는 더욱 열의를 불태우는 모습이었다.
이제는 졸업이구나.
파네스는, 자신의 머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는 크기의 식물 표본 앞에서 잠시 생각을 흘려보냈다. 한 학기 내내 공을 들인 제 과제물은 제법 훌륭하게 성장했다. 손을 뻗어 이파리를 어루만지니 그것이 반응하듯 가지 끝을 흔들었다. 단지 자극에 반응한 게 아니라 제 에테르를 감지하고, 너인 줄 알아보았노라 표현하는 것이다. 파네스는 그에 화답하듯 줄기를 쓰다듬었다. 생장용 광열(光熱)기에서 내리쬐는 빛에 손등이 따스했다.
아모로트의 모든 시민은 의무가 있었다. 자신을 발전시키고, 아모로트를 발전시키고, 세계를 발전시킬 의무. 그런고로 청년이라면 아카데미아에 입학하여 발전시킬 재능을 찾는 일이 권장되었다. 물론 적당한 재능을 발견하지 못하거나, 고른 재능에 소질이 없다는 것이 밝혀져도 문제는 없었다. 인간은 모두 무한한 시간을 산다. 그렇기에 종착점이 없는 여행길에서 조금 돌아서 간다고 한들 문제 되지 않았고 또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다.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걸맞은 직분-자리를 맡는 일은 아모로트에서 가장 큰 영예인 것은 확실했으나, 그만큼 일시의 방황이나 휴식도 인생의 좋은 양분이 된다고 여겼다. 그러니 자신이 졸업 이후의 삶을 결정하지 못한 데에 대해서도 조급해할 필요가 없을 터였다. 그럴 터였다.
파네스는 괜스레 심란해져 고개를 내저었다. 표본이 담긴 흙에 손끝을 파묻고 갉작대고 있으니 전등이 저절로 달칵, 꺼지는 소리가 났다. 파네스는 고개를 들었다. 꺼진 광열기의 전구에 잔광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아, 에이아. 왔구나." 허리를 찬찬히 펴며 제 옆에 선 이를 향해 말했다. 에이아라고 불린 작은 로브 덩어리는, 스위치에서 손을 떼고 화단의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무슨 일 있는 거야, 판?" 하얀 반(半)가면 아래로 삐죽 입술을 내민다. "내가 몇 번이나 불렀는데." 아모로트인답지 않게 감정 표현이 풍부한 그는 불만스러운 티를 내며 팔짱을 꼈다.
"내가 그랬니?" 파네스는 클립보드에 꽂아둔 펜대를 만지작댔다. 어쩐지 흥미 없게까지 들리는 목소리가 스스로도 적잖이 낯설었다. "미안. 집중하느라. 이 이데아의 이름을 아직 정하지 못했거든." 상냥하게 들리길 바라며 변명을 낸다. "…보고서는 제출했어?"
"응. 어차피 내 이데아는 정식 심사도 못 넘어갈 것 같아서 적당히 썼어." 그가 버릇처럼 손을 파닥파닥 흔들었다. "그리고 학술원에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후후,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파네스는 자신의 사촌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 "졸업하고서 어떤 일을 하게 될 지는 누구도 모르니까. 열심히 해두어서 나쁠 일은 없을 거야." 그렇게 말하곤 에이아를 따라 옆에 걸터앉았다. "……우리도 곧 졸업이구나. 넌 여행을 떠날 생각이라고 했었지?"
"맞아. 기억하고 있구나." 에이아가 용케 그 좁은 화단 위에서 무릎을 끌어올려 웅크리고 앉았다. "파네스는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글쎄. 지금은 잘 모르겠어." 파네스는 천천히 말하며 클립보드를 가슴에 모아 안았다. 네모난 모서리에 턱을 슬며시 기댔다. "조금 더 고민해보려고. 아직 시간도 많고… 또 이 아이 이름도 못 지었고, 과제도 제출 못했잖아?" 농담처럼 덧붙이자 그의 사촌이 웃었다.
"그러엄. 뭐든 이름을 제대로 붙여주는 게 중요해. 천천히 고민해." 에이아는 가볍게 어깨를 톡톡 두드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다, 이거!"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팔짝 뛰어오르더니 소맷자락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
내민 것은 종이로 만들어진 전서구―정말로 새 모양을 한―사역마였다. 파네스는 의아한 마음으로 그것을 건네받았다.
"휘틀로다이우스가 전해달라고 했어."
파네스는 제출용 이데아를 품에 안은 채 천천히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상급생인 그를 알아보고 여기저기서 인사를 했다. 가볍게 눈웃음으로 알은체를 하면서도 머릿속이 묘하게 심란하여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다름이 아니라 며칠 전부터 고민 중인 일 때문이었다(물론 과제의 몫도 조금은 있었지만). 하필 그 고민의 대상자가 보낸 편지라니. 어차피 하고 싶은 말이 있었으니 다행일까 싶다가도,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었다.
―「오늘은 그곳에서 볼까?」
깔끔하고 익숙한 필치였다. 발신인이 쓰여 있지 않아도 가볍게 획을 흘린 모양이나 눌러쓴 모양을 보고서 알아챘을 것이다.
파네스는 며칠간 휘틀로다이우스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었다.
휘틀로다이우스와는 기억도 안 날 만큼 까마득하게 미성숙한 시절부터 보아온 친구 사이였다. 그냥, 눈을 뜬 순간부터 항상 곁에 있었다고 생각할 만큼. 무릇 인간이라면 태어나 눈을 뜬 순간부터 가르쳐주지 않아도 숨을 쉴 줄 알고, 자연스레 창세술을 사용할 줄 아는 것처럼, 그의 존재 자체가 제게는 공기나 물, 생명, 마법처럼 당연했다. 아마 휘틀로다이우스에게도 자신이 그러한 존재이리라. 이를테면 강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명징한 진리처럼, 서로의 곁에 서로가 있으며 세상 누구보다 가장 가까운 친구 사이라는 점을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둘의 우정에는 나이가 비슷하다는 점도 한몫을 했다. 아카데미아 역시 비슷한 시기에 입학을 했고, 이젠 함께 졸업을 앞둔 참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휘틀로다이우스는 졸업 이후에 어떻게 한다고 했더라. 정확하게 정하지는 않았다고 했지만, 아마도 보는 눈이 매우 뛰어나니 창조물 관리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물론 그가 관리국에 들어간다 해도 교류는 계속할 것이니 문제는 없었다.
그럼 앞으로도 지금과 같은 사이로 지내는 건가….
순간 가슴을 스친 감정은 아쉬움이었다.
아쉬움이라니? 파네스는 스스로 의문을 품었다. 생각의 대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라서였다. 휘틀로다이우스는 좋은 사람이고 지금까지 좋은 친구였다. 언제나 자신을 믿어주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곁에서 지탱해준 사람. 그런 이와 앞으로도 친교를 이어나가는 일은 분명 기쁘고 행복한 일이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어째서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그런 탓에 며칠간 이유를 알 수 없어 곰곰이 생각에 빠져있었다. 사무실에 과제를 제출하고 나서 아카데미아를 나와 집으로 향하는 와중에도 머릿속에는 '왜지?' 이 생각만이 가득했다. 무의식 중에 손아귀에 잡힌 종이쪽지를 바스락바스락 어루만졌다. 전서구(傳書鳩)라지만 비둘기가 아니라 다른 새 모양, 어쩐지 날개가 짧고 몸통이 둥글어 날지 못하는 새의 형상을 한 그것은, 언젠가 휘틀로다이우스에게 지나가듯 좋아한다 말했던 모양의 창조물이었다. 손가락으로 종이 모서리를 가만가만 쓰다듬고 있으니 자연히 그에게로 생각이 넘어갔다. 저도 모르게 상념이 물 흐르듯 하는 동안 발걸음도 멈추지 않아, 어느새 관청 거리까지 지나 약속 장소 근처였다.
그가 말한 장소는 에테라이트 광장에서 몇 블록을 지난 골목의 한 귀퉁이, 특이하게 생긴 나무가 서 있는 곳이었다. 그 나무는 언젠가 파네스가 하교하는 길에 발견한 것이다. 집으로 가는 방향에 있어, 언젠가부터 수업이 마치면 먼저 끝난 사람이 와서 기다리는 곳으로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었다. 졸업이 가까워진 요즈음에는 좀처럼 함께 돌아가지 못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휘틀로다이우스는 먼저 도착해 있었다.
파네스는 그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아모로트의 그 누구보다도 멀리 보는 사람이니 자신이 오는 것쯤은 충분히 알고 있었을 텐데도, 별다른 티를 내지 않은 채 발걸음 소릴 듣고 이제야 발견했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만을 띠고 이쪽을 쳐다본다. 가까이 다가가자 휘틀로다이우스는 자연스럽게 손을 잡아 왔다.
"어서 와, 파네스."
그의 목소리는 손의 온기와 마찬가지로 온화했다. 예전부터 변함없는 온기다. 둘의 키가 지금의 절반만큼도 되지 않았을 시절부터 변함없이 따스한 손바닥이자, 익숙한 행위였다. 파네스는 새삼스레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라서 웃었다. 그 시절부터 항상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둘이서 손을 잡는 것은. 언제나 이렇게,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던 일.
둘은 걷기 시작했다. 휘틀로다이우스는 큰 키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보폭을 맞춰 천천히 걸었다. 후드 자락 바깥으로 비어져 나온 머리카락이 바람에 한들거렸다.
졸업을 하고 나면 이렇게 함께 돌아가는 일도 끝인 걸까?
아니, 분명 휘틀로다이우스라면 언제 어디서든, 둘의 소속이 달라지든 말든, 애초에 자신이 어떤 길을 선택하든―선택을 하기 위해 고민 중이라 해도 기꺼이 함께 해줄 것이었다. 언제나처럼 같은 장소에서 자신을 기다려서, 이렇게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줄 것이었다.
그때, 파네스는 깨달았다.
―친구가 아니라 다른 관계가 되고 싶어서잖아.
그러한 결론을 도출해내자마자 자연스레, 가면 밑으로 볼이 화악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며칠간의 고민이 구름처럼 푸스스 흩어지고, 이제 다른 형태로 명확해졌다. 그래서였구나. 친구가 아니라 다른 관계가 되고 싶어서. 좀 더 다른 범주로 그와 자신을 정의하고 싶어서였다. 조금 더 정확하고 명확한 어휘로 명명하고 싶어서, 이대로도 분명 좋지만, 변하고 싶어서. 한 걸음 나아가고 싶어서, 그래서.
파네스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네게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
편히 이야기하라는 듯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가면 너머로도 훤히 보일 만큼 눈가를 휘며 미소를 짓고 있는 듯했다. 파네스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괜찮다면… 우리 관계의 재정립을 요구해도 될까?"
"어떤 이유로?" 휘틀로다이우스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재촉하지 않는, 조용한 목소리였다. 곧은 시선이 자신을 다정하게 응시하고 있어 마음 한 구석이 발목 높이서 밀려드는 물결에 젖어 드는 양 간질간질했다.
"내가 휴에게 느끼는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싶어졌어." 말로 내뱉으니 그 감각은 더욱 또렷해졌다. 발목께를 넘어 무릎, 가슴, 목 끝까지. "며칠 동안 계속 고민했어. 지금도… 아니, 항상 내가 휴를 좋아했다는 건 확실하지만. 휴는 내게 소중한 존재니까 내 마음을 깊이 돌이켜보고, 우리에게 어울리는 적당한 단어를 찾아보고 싶었어. 이제는 친구가 아니라."
거기까지 말하고 고개를 숙이니, 휘틀로다이우스가 무릎을 꿇으며 시선을 맞추었다. 놀라거나 혹은 놀리는 태도가 아니라, 이러한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 언제나처럼 자신을 믿어주는 그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즐거워 보이기까지 해서, 저도 그에게서 옮듯이 미소가 비어져 나왔다.
"친구가 아니라?" 휘틀로다이우스가 되물었다.
"그러니까…… 네가 좋아, 휘틀로다이우스." 이야기하면서도 분명 그가 거절할 일은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너와 공식적으로 연인이 되고 싶어. 연인들끼리 하는 일도 하고 싶고… 이제는 친구이자 연인으로, 내 삶의 유일하고 영원한 동행이 되어준다면 그보다 기쁜 일은 없을 거야." 침착하게 선언하듯 말했다. 아니.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심장은 벌새보다 바쁘게 뛰고 있었다. 영원 같은 찰나가 흘렀다.
"……나는 네가 언제 그 말을 해줄지 기다리고 있었어." 휘틀로다이우스가 다정하게 말했다. "나도 좋아, 파네스.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관계를 재정립하자." 그가 손을 뻗어, 가면 위로 단정하게 내려온 까만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평소와 같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지는 행동이었다. 파네스는 붙잡은 쪽의 손에 힘을 꾹 주었다.
"오늘부터?"
"오늘부터." 속삭이듯 물은 질문에도 그는 확실하게 답을 돌려주었다.
"내가 어디로 떠나든지?"
"항상, 언제까지든."
기다리고 있을게. 휘틀로다이우스가 덧붙인 말에 파네스는 밝게 웃음을 터뜨렸다. 파네스는 그의 오랜 친구로서 알 수 있었다. 선명한 예지이자 확신이었다. 이건 분명 깨어지지 않을 약속이리라고. 약속을 한 이상, 아니, 이렇게 약속하지 않았더라도―반드시 기다려줄 사람. 아카데미아를 떠나, 설령 아모로트를 떠나 아주 오랜 시간을 떨어져 떠돌게 되더라도….
이마를 간질이는 바람이 부드러웠다.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미풍이었지만 오늘은 어쩐지 달랐다.
새로운 해의 시작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