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 포함 3,810자
* FF14 기반 자캐 커플
라킨발드가 옌시나 유미르를 자신의 집에 들인 이후로 알게 된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이 여자는 이십 년 동안 좀처럼 변한 게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를테면,
"미안, 옷 좀 빌린다?"
하고는, 맨몸에 남의 셔츠 차림으로 아침 식사 자리에 나타나거나 하는 일, 이십 여 년 전과 다를 바 없이 헐렁하고, 뭐든 제 맘대로에, 자신을 놀려먹고 싶어 안달이 나 있다는 사실 같은 것 말이다.
둘의 기상 시간이 모두 이른 탓에 아침 식사 역시 일렀다. 식사 준비는―옌시나가 파멸에 가까운 요리 솜씨를 지닌 탓이기도 했지만―대개 집 주인인 라킨의 몫이었다. 두꺼운 호밀빵을 잘라 버터를 바르던 라킨은 옌의 모습을 보고 잠시 침음을 흘렸다가, 가까스로 아무렇지 않은 척 이야기했다.
"옌, 이미 입고 왔으면서…… 됐으니 어서 앉아."
"미안, 에오르제아가 좀 추워야 말이지."
옌시나는 호쾌하게 웃으며 남자의 곁에 자리를 잡았다. 맞은편에 앉으면 되지 않겠느냐, 그런 눈빛으로 불안하게 눈치를 주었더니 옌이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로가 두 개니까 이쪽이 더 따뜻해."
동시에 손가락으로 자신과, 주전자가 끓고 있는 스토브를 가리켰다. 스토브와 함께 난로 취급이었나. 라킨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이런 건, 아직도 여전하네."
"난 달마스카 사람인 걸. 이미 이렇게 태어난 걸 어쩌냐. 자, 이제 난로는 조용히 해."
그러더니 아무렇지 않게 가슴이 닿을 만큼 가까이 몸을 붙이고는, 원래는 맞은편에 놓여있던 제 몫의 접시를 끌어당겼다. 밖으로 거의 나올 뻔한 한숨을 참았다. 문득 자신이 어렸을 때에도 에오르제아는 춥다고 늘 불평을 하던 것이 기억났다. 라킨은 그러면 좀 더 긴 옷가지를 걸치면 되지 않겠느냐(……바지도 입고), 그 말이 무심코 목 끝까지 밀려 나왔으나 이것도 참았다. 어쨌거나 옌시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비록 나이도, 외견도―비에라인 그녀와는 달리 자신만 눈에 띄게 늙었다고는 하나―그때와는 달라졌다고 해도 여전히 옌은 옌이었다. 정말로 그런 사람이라는 점만큼은 달라지지 않아, 오히려 남다른 소회를 불러일으켰다.
……'그때'에는 자신은 스물 초입에, 머리에 피도 덜 마른 청년이었고, 그녀는 여전히 '옌'이었다. 사소한 차이는 있었으나 그때도 이미 자신보다는 한참 연상에 '어른'이었다. 그때에도 지금처럼 유난히 추위를 탔고, 요리 솜씨는 젬병이라 거둬진 입장인 자신이 요리를 해야 했었다. 옌시나와의 재회는 예전처럼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때에는 옌이 자신을 구해주었던 것이 이번에는 반대였을 뿐이었다.
둘이 생활을 공유하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소싯적부터 알던 사이라고 해도 옌은 아무렇지 않게 남자의 일상을 침범하여 자연스레 뿌리를 내리고, 스스럼없이 거리를 좁혔다. 그간의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듯 남자의 보금자리에 파고들었다.
옌이 고개를 푸르르 흔들자 풍성한 복숭앗빛 머리카락이 어깨 너머로 흘러내렸다. 이전에 옌은 해방군에서 활동할 적 머리를 짙은 색으로 물들이기도 했었다. 그런 기억이 떠올라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달마스카 출신임에도 유난히 머리색과 피부색이 밝은 그녀는, 눈에 띄는 외모로 인해 잠입 등의 임무에서 제외되는 일에 대해 자주 불만을 표했었다. 현재는 허리를 덮을 만큼 긴 머리도 그때에는 훨씬 짧게 유지했었다. 그의 눈길이 제 머리칼에 닿아있는 걸 눈치챈 듯, 옌이 말했다.
"한 번 기르니까 편하더라고. 에오르제아에선 두드러지는 편도 아니고."
"……그렇구나."
그런데 거기까지 말한 뒤에는 시선을 돌려야 했다. 잠깐이라고는 하나, 소매가 크고 품이 맞지 않는 옷이 흘러내려 하얀 살결이 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의 단련으로 잘 짜인 근육과, 특유의 뽀얗고 소담한 곡선이 고스란히 드러나 곤란했다. 애송이처럼 여체를 처음 목격했다거나 하는 이유로 놀란 것은 아니었다. 옌시나는 어릴 적 자신을 돌봐주었던 은인이며, 알라미고 해방 전선에도 함께 참전한 전우에, 성도교에도 같이 몸담았던 동료가 아닌가? 생사를 오가는 전장에서 나신 같은 것에 신경 쓰고 놀라는 건 우스꽝스러운 일이고, 그런 광경을 한두 번 목격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전쟁터도 아니었고, 하물며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아니, 아니지. 라킨은 머릿속에서 정정했다. 옌시나는 예전부터 알 수 없이 느슨한 인간이었고, 그런 느슨함에 당황하는 것은 항상 자신이었을 뿐이다. 옌은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상한 눈치로 웃고는 슬그머니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길고 복슬복슬한 귀가 목덜미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아슬아슬한 거리감에 저도 모르게 몸이 굳는 것을 상대가 모를 리 없었다. 옌이 불쑥 이야기했다.
"만져보고 싶으면 만져봐도 되는데?"
"……뭐, 뭐라고?"
순간적으로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고개를 다시 돌리니 옌이 묘하게 반짝이는 옅은 잿빛 눈동자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닿는 중이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더욱 가까이 붙어오는 탓에 얇은 옷가지 너머로 따뜻하고 말캉한 살결이 부드럽게 눌리는 것이 느껴져 더욱 힘들었다. 옌이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머리카락 말이야. 정말 많이 길었지?"
"……."
그럼 그렇지. 동시에 라킨은 '나는 난로 대용이다' 그런 생각을 열다섯 번 정도 하고 나서야 가까스로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 옌시나의 장난에 놀아났다는 생각이 불쑥 들어 괜히 억울해졌다. 정말이지 예전부터 그래왔다. 예전에는 아예 꼬맹이라는 이유로 그랬으니 이해라도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중년이라는 단어가 어색하지 않을 만큼의 나이가 되었건만, 이래서야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지 않나.
그런 생각에 라킨은 없던 용기도 끌어올렸다. 옌이 기댄 쪽의 팔을 슬그머니 빼서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듯이 하고는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생각보다 훨씬 폭신하고 부드러워서 자신이 되레 놀라듯 움찔하고 말았다. 몇 초쯤 지나자 거울을 보지 않아도 제 얼굴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목덜미가 화끈거리는 정도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옌이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어 괜히 가슴이 쿵쿵거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중얼거렸다.
"그렇네. 이것도 잘 어울리는 것 같아."
하지만 옌시나는 특별히 놀라지도, 그렇다고 화를 내지도 않는―묘하게 즐거운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았다. 굳이 표현을 하자면 그러했다. 불현듯 서로 코끝이 맞닿을 정도의 거리라는 점을 알아챘다. 옌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양순한 모양으로 처진 둥그런 눈매,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보기 좋은 빛깔의 입술, 한쪽 팔에 감겨오는 얄쌍한 허리와 굴곡까지. 자신도 똑같이 그녀에게도 보이고 있으리란 생각을 했다. 그러자 걷잡을 수 없이 귓가가 달아올랐다. 그렇다고 그녀가 먼저 몸을 빼지도 않아서, 결국 물러나는 것은 자신이었다. 도로 식탁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옌이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 라킨은, 꼭 예전의 애송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옌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그나저나 너, 애인도 없고…… 정말 재미없게 사는구나. 이런 날에도 나랑 같이 있고."
너 정도 나이면 아직 인간들 기준으로도 젊은 편이잖아? 이런 날에는 좀 나가서 몸도 부딪히고 해야… 그런 늙은이 같은 말을 짓궂게 중얼거리던 옌시나는, 문득 생각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질문했다.
"그동안 그런 사람 없었어? 응?"
"……."
가까스로 식사를 다시 시작하려던 라킨은, 들고 있던 나이프를 떨어뜨릴 뻔했다.
"흐응. 그렇구나. 알겠어."
대체 뭘 알겠는지는 모르겠지만 옌시나가 저 혼자 답을 내리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어라 반박하기도 전에―대답할 말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지만―그녀가 이전보다 더 물리적으로 거리를 좁혀 달라붙어 왔기에, 라킨은 억울해 하지도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옌의 페이스에 휘말려야 했다. …그런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