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29
커미션//휴아노

*공백 포함 4,629자

*FF14 휘틀로x아노

*신청자님의 자체적인 설정을 바탕으로 합니다.


 

 

 

    느지막이 시간이 흐르는 아모로트의, 어느 날 저녁이었다.

 

    아직은 어렸던 파네스가 기억하기로 그날의 저녁 식사에는 낯선 얼굴, 아니지, 가면도 함께였다. 늘 식사를 함께 하는 제 사촌과 휘틀로다이우스, 그리고 새로운 가면까지 해서 넷이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가면 밑에서 눈을 도록도록 굴렸다. 그중에서도 특히 작은 키의 로브 덩어리는 호기심이 퐁퐁 솟아오르는 것을 감추지 못하는 눈치였다. 휘틀로다이우스가 말했다.

 

        "전에 이야기했던 그 친구야. 이름은……."

        "하데스라고 해요."

 

소개받은 아이가 어물어물 답했다. 로브의 후드 밑으로 하얀 머리카락이 드러나 있다. 에이아는 하데스의 소개가 끝나기 무섭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와!" 아모로트인답지 않게 감정표현이 풍부한 그녀는, 마치 토끼처럼 팔짝팔짝 뛰며 하데스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네가 히스, 그러니까, 응… 휘틀로다이우스가 엄청 현명하다고 했던 걔구나? 몇 살이야? 어디서 살아? 히스랑은 언제부터 친구?"

초면부터 궁금증을 와르르 쏟아놓자 하데스는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나이는 휘틀로다이우스랑 같고, 우리 집은 저기 폴리레리타 관청 거리를 지나서……." 아이가 차근차근 대답하다, 도와달라는 듯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이미 에이아의 기행에는 파네스와 휘틀로 두 사람 모두 익숙하다 못해 이상함을 인지하지 못하는 편이었고, 그래서 그의 고충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방긋 웃어주기만 했다.

 

    가벼운 소란이 가라앉는 동안 파네스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어서 와, 휴." 뒤늦게 인사를 건네자 휘틀로다이우스는 다시금 빙그레 웃어보였다. 파네스에겐 아주 작았을 적부터 함께 한 친구가 둘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휘틀로다이우스였다. 에이아는 제 사촌이니 그렇다 치지만, 휘틀로는 같은 콩 꼬투리 안에서 창조된 콩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오랫동안 친구인 사이다. 여기에는 둘의 연배가 비슷하다는 것도 한몫을 했다. 아모로트의 사람들은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살았기에 나이를 엄밀히 따지는 편은 아니었으나, 동년배라면 비슷한 속도로 성장하며 비슷한 리듬으로 삶의 과정을 겪는다는 것이니 여러모로 가까워지기 좋은 조건이긴 했다.

    휘틀로다이우스는 자연스럽게 다가와 손을 붙잡았다. 파네스는 늘 하던 일이었기에 큰 생각 없이 그의 손을 맞잡았다. 자신이나 에이아보다도 조금 더 큰 키의 그는, 어쩐지 손바닥도 제 것보다 조금 더 컸다.

 

        "자, 그럼 하데스는 휘틀로다이우스 옆에 앉을래?" 파네스는 하데스를 흘긋 쳐다보며 제안했다. 그는 다소 수줍음을 타는 편인지 말수가 적었다. "오늘 처음 와서 익숙하지 않을 테니까……." 테이블은 사각 모양으로, 두 명끼리 서로 마주 보게 되어 있었다. 하데스와 휘틀로는 이미 안면이 있는 사이라고 했으니 그렇게 앉는 게 편하겠거니 싶어 이야기를 꺼냈다.

        "앗, 안돼. 나는 평소처럼 여기 앉을래. 파네스랑 마주 보고 앉는 게 좋단 말이야!"

 

    그러나 에이아가 고집을 부리자 조금 곤란해졌다. 원래 평소 식사를 할 때에는 파네스와 에이아가 마주 보고 앉고, 객으로 방문하는 휘틀로다이우스는 둘 중 아무나 옆에―대체로 파네스의 옆자리에―앉는 편이었다. 세 명 사이에서 거의 규칙과 마찬가지로 굳어진 것이었기에 에이아가 언뜻 반발을 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파네스는 제 사촌의 고집을 알았기에 쓰게 웃었다.

 

        "그래, 그럼… 하데스도 괜찮니?"

        "네… 아, 아니. 괜찮아. 상관없어."

        "그래! 빨리 앉자!"

 

    에이아의 재촉에 자리는 금방 정리되었다. 파네스는 평소처럼 휘틀로다이우스의 곁에 앉게 되었다. 휘틀로에게 '괜찮겠어?' 눈으로 질문하니 그 역시 가만히 답했다. '괜찮아. 엔도 그렇게 심하게 하진 않을 거야.' 목적어를 생략해도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자리에 앉고서도 에이아가 특유의 성격으로 하데스를 '괴롭히는' 동안 식사가 착착 준비되었다.

    식사는 아모로트 대개의 가정이 그러하듯 가벼운 식전 빵이 하나, 그리고 주요리가 하나, 음료와 간단한 디저트 정도였다. 조리된 음식 자체를 창세술로 만들 수도 있었으나('즉석 식품'이라는 이름의 이데아로 존재한다고 들었다) 창세술은 가장 시원始原적인 것―다시 말해 원재료에 해당하는 종자를 먼저 창조하고, 후에 조리―라는 이름의 창세술―이 권장되었다. 또한 열기를 다뤄야 해서 아직 어린 시민들보다는 조금 더 나이를 먹은 시민들이 배웠다.

    파네스는 포크를 쥐고 별다른 생각 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오늘의 요리는 밀가루로 만든 얇은 파스타 사이에 속을 채워서 만드는 라비올리였다. 하나는 시금치, 다른 하나는 치즈가 들어있었다. 파네스는 라비올리의 배를 꾹 갈랐다. 이번 것은 시금치였다. 그때 옆에서 흰 손이 휙 다가왔다.

 

        "자."

 

    휘틀로다이우스가 시금치가 들어간 라비올리만 골라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파네스의 접시에 옮기는 것이다. 파네스는 차곡차곡 높아지는 제 접시를 바라보다 풋, 웃음을 터뜨렸다.

 

        "너, 자연스럽게 떠넘기는구나. 갈라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았어?"

        "보이니까."

 

    그는 간단히 대답했다. 휘틀로다이우스는 편식이 심한 편은 아니었고, 파네스의 집에 손님으로 방문할 때에는 항상 예의를 지켰지만 지금처럼 간혹 먹기 싫은 것이 있으면 그녀에게 은근히 넘기고는 했다. ("판이 자꾸 받아주니까 히스가 더 그러는거잖아." 진짜 편식쟁이인 제 사촌은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오늘은 익힌 시금치가 추방 대상인가보다. 받은 것을 내버려 두자 만족스러운 얼굴이 된 휘틀로다이우스가 웃었다.

 

        "후후."

        "그래도 시금치는 맛있는데."

        "그래서 파네스에게 준 거야. 네가 좋아하니까. 응."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천연덕스럽게 다른 접시를 끌어다 놨다. 그는 아모로트인들 중 드물게도 보는 눈을 가진 이였는데, 아무리 그래도 모든 사물을 들여다볼 수 있다지만 그런 능력을 편식에 쓰다니. 파네스는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휘틀로다이우스는 네가 어째서 웃었는지 알겠다는 얼굴로 능청스럽게 입가에 미소를 올렸다. 식사 시간마다 늘 있는 일이었다. 시야의 오른편, 꼭 이 자리에서 보이는 미소가 참 익숙했다. 휘틀로다이우스는 언제나 그렇게 다정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린 아이라 할 지라도 로브와 가면을 쓰는 일이 권고되었기에 식탁에 앉은 넷이 모두 똑같은 차림이다. 그러나 파네스는 문득 어쩐지 휘틀로다이우스만큼은 언제, 어디에서든지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처럼 에테르의 흐름을 볼 줄 아는 것도 아니었지만, 가면 밑으로 드러난 입매라든지. 언젠가부터 자신보다 키가 커져, 살짝 올려다볼 때의 턱선 같은 건 아무리 긴 시간이 흐른대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을 테다.

 

     ―그 광경이 영혼에까지 새겨져 영원히 남게 될 줄, 그때의 자신은 아직 몰랐지만.

 

    식사는 대체로 무난하게 흘러갔다. 하데스는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드물었지만 휘틀로다이우스가 일전에 소개했던 대로 예의 바르고 현명한, 훌륭한 작은 시민이었다. 바로 옆에 앉은 이가 아모로트 시민답지 않게 부산스럽고 호기심 많은 그 에이아라는 것이 문제 아닌 문제였으나 별다른 사건은 없었다. 오히려, 일견 상극처럼 보이는데도 하데스는 그녀의 이야기에 끈기 있게 어울려주고 있었다. 파네스와 휘틀로는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었다. '별일 없겠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러거나 말거나 시간은 흘렀고, 디저트로는 딸기가 앙증맞게 올라간 타르트가 나왔다.

 

    딸기는 건너편의 제 사촌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흘긋 건너편을 바라보자 에이아는 딸기를 눈 깜짝할 새 해치우곤 타르트 위에 얹어진 크림에 골몰하는 중이었다. 작은 손에 쥐어진 포크가 쿠키로 이루어진 성을 공성하듯 타르트지를 무참히 무너뜨렸다. 딸기 말고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태도다. 파네스는 주의를 주어야 할 지 잠시 고민하다 그냥 내버려 두었다. 에이아의 까다롭고 예민한 식성―그녀의 입맛은 꼭 성격처럼 이곳저곳으로 튀어 다녔다―에는 이미 익숙한 참이었기에 오히려 제 타르트의 딸기나 양보해줄까, 그런 생각을 했다. 곰곰이 생각하던 파네스는 행동으로 옮기기로 했다. 말없이 접시를 건너편을 향해 밀어주는데, 옆에서 슬그머니 하얗고 긴 손가락이 다가왔다. 휘틀로다이우스였다. 그 애는 제 몫의 타르트를 내밀었다.

 

        "내 건 파네스가 먹어."

        "……응, 고마워."

 

        파네스는 선선히, 기쁘게 받아들었다. 바라고 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휘틀로다이우스는 언제나 그랬다. 항상 다정한 친구였다. 항상 그 자리에서 바라보고 있다가, 가만히 웃어주고, 무엇이든 제게 먼저 양보하고. 시금치는 그 애의 작은 투정 같은 거다. 기분이 어쩐지 구름처럼 푹신해졌다. 시럽을 얇게 코팅한 딸기는 적당히 달고 새콤했다. 크림은 부드러웠다. 먹지 못했으면 조금 아쉬웠을 만큼, 맛있는 타르트였다.

    나중에도 이렇게 지내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제 곁에 그 애가 있는 건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사실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아모로트의 아이들은 조숙했고, 파네스 역시 그러했다.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생각이 아주 잠시 자신을 사로잡았다가, 혀끝의 단맛과 함께 사르르 녹아 물결처럼 쓸려나갔다. 앞으로도 쭉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 파네스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확고한 결론을 내렸다. 그때 건너편에서 커다란 소음―정확히 말하자면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다름 아니라 하데스가 갑자기 와앙, 울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 옆에서 에이아는 허둥지둥 그를 달래고 있었다. 파네스는 순간 웃음을 터뜨릴 뻔한 것을 참고 휘틀로다이우스와 시선을 교환했다.

 

        '……휴, 쟤 울어.'

        '괜찮을 거야. 아마도.'

 

    그런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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